(베를린=연합뉴스) 김계연 특파원 = 전세계 정재계 인사들이 모여 글로벌 현안을 논의한다는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일명 다보스포럼)가 23일(현지시간) 폐막했다.
다보스포럼은 원래 정치·경제 엘리트들의 친목행사이자 허황된 말잔치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역대 가장 많은 60여개국 정상이 참석한 올해 행사는 이런 지적마저 무색하게 그린란드 갈등을 일으킨 뒤 행사장을 직접 찾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독무대가 됐다.
◇ 트럼프 '그린란드 타코쇼'
올해로 56회째인 다보스포럼은 이날 스위스 다보스 국제회의센터에서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와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의 세계경제전망 토론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각국 정상과 경제·외무 관료, 최고경영자(CEO)급 기업인, 국제기구 대표 등 3천여명이 참석해 닷새 동안 200여개 세션이 열렸으나 지난 19일 개막 전부터 시선은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에 집중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7일 덴마크령 그린란드를 내놓으라며 여기에 반대하는 유럽 8개국에 10% 추가 관세를 예고한 뒤 비행기를 탔다.
그는 21일 오후 80여분간 연설에서 그린란드 갈등의 당사국 덴마크와 프랑스·영국·캐나다 등 전통적 동맹국, 지난해 자신이 39% 고율관세를 매긴 행사 주최국 스위스까지 차례로 조롱한 뒤 그린란드 얘기를 본격 꺼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반구 최북단에 있는 우리의 영토"라며 그린란드 영유권을 거듭 주장했으나 군사력 사용을 배제하고 즉각 협상하길 원한다고 말해 일단 한발 물러섰다.
몇 시간 뒤에는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과 회동에서 미래 합의의 틀(프레임워크)을 만들었다며 추가 관세도 철회한다고 소셜미디어에 적었다. 유럽 정가뿐 아니라 관세 위협으로 며칠째 출렁이던 금융시장도 또 나온 '타코'(TACO·트럼프는 항상 꽁무니를 뺀다)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 다음날은 새 국제기구 출범식
트럼프 대통령은 이튿날 다보스에서 자신이 의장을 맡아 새로 만든 국제기구 '평화위원회' 헌장 서명식을 열었다. 트럼프가 초청하는 나라에 한해 3년간 회원국 자격을 주고 예외적으로 첫해 10억달러를 내면 영구 회원국이 될 수 있다는 이 기구에 서방은 대부분 불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원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재건을 위해 추진한 평화위원회로 유엔을 대체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가 유럽에 추가 관세를 때리며 예고된 '타코쇼'를 지켜보느라 전세계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꼽히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뒷전으로 밀렸다. 유럽 지도자들은 그린란드를 달라는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고 대서양 동맹의 중요성과 유럽 자강론을 설파하는 데 연설시간의 대부분을 썼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2일 다보스포럼 행사장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 회동한 뒤 우크라이나 전쟁 해결을 위한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다며 그린란드에 온통 시선이 쏠린 유럽을 이례적으로 비판했다.
◇ 기업인들 "AI가 일자리 만든다"
기업인들은 인공지능(AI)과 미래 일자리 등을 논의했으나 그린란드 갈등에 묻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반도체업체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는 "AI는 필수적인 국가 인프라"라며 AI 거품론을 일축했다. 그는 "지금까지 수천억 달러가 투입됐지만 추가로 수조 달러(수천조원) 규모의 인프라가 증축돼야 한다"며 AI 발전이 건설업·제조업 분야까지 일자리를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브렛 테일러 오픈AI 이사회 의장은 "AI는 아마도 거품일 수 있다"면서도 "경쟁은 좋은 것이고 결국 자유시장이 최고의 제품과 가장 높은 가치를 찾게 된다"고 말했다.
재계 인사들은 대체로 미국의 AI 독주를 재확인하면서 AI가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와 결합할 가능성도 제시했다.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는 "1년 전 딥시크 R1 모델 출시 당시 반응은 너무 과도했다"며 중국의 AI 기술이 서방보다 6개월 정도 뒤처진다고 말했다. 구글 딥마인드 출신인 프랑스 업체 미스트랄AI의 아르튀르 멘슈 CEO는 이에 대해 "동화 같은 이야기"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언론은 그가 밝힌 올해 매출 예상치가 오픈AI와 앤트로픽 등 미국 경쟁사들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데 주목했다.
미국 국방부와 국토안보부·이민세관단속국(ICE) 등에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팔란티어의 알렉스 카프 CEO는 AI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논리에 반박하면서 "AI가 대규모 이민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 '신스틸러' 머스크·마크롱
트럼프 대통령 이외에 그나마 관심을 끈 인물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었다.
머스크는 그동안 "엄청 지루하다", "지구의 보스가 되려는 거냐"며 다보스포럼의 초청을 거부해 왔다. 전날 다보스에 깜짝 등장한 그는 대담 자리에 앉자마자 트럼프의 평화위원회(board of peace)를 가리켜 "'piece'(조각)인줄 알았다. 그린란드 작은 조각, 베네수엘라 작은 조각, 우리가 원하는 건 조각뿐이니까"라고 농담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눈 보호용으로 에비에이터 선글라스, 일명 '탑건' 선글라스를 쓰고 나와 시선을 모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그는 강경하게 보이기 위해 애썼다"고 조롱했다. 트럼프는 앞서 프랑스산 와인과 샴페인에 200% 관세를 물리겠다며 마크롱 대통령에게 평화위원회 참여를 압박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그러나 연설에서 "용납할 수 없는 관세를 영토 주권에 대한 지렛대로 사용하고 있다", "제국주의적 야망이 고개를 들고 있다"며 트럼프를 정면 비판했다. 마크롱이 쓰고 나온 659유로(약 114만원)짜리 선글라스는 주문이 폭주하고 생산업체 주가도 급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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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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