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를 보고 순간 섬찟했어요. 솔직히 ‘나도 저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천장에서 소음이 들릴 때면 나도 모르게 극심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니까요.”
지난 20일 오후 충남 천안시 서북구의 한 아파트 단지. 지은 지 20여 년 된 아파트 거실에서 만난 주민 박모(48)씨는 윗집에서 “쿵” 소리가 날 때마다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한 달 전 인근 아파트에서 층간소음 문제로 흉기 난동 사망 사건이 발생한 이후 연일 잠을 설치고 있다. 박씨는 “겨울이라 창문을 다 닫아놓으니 윗집 남자가 기침하는 소리는 물론 휴대폰 진동 소리까지 벽을 타고 내려와 귀에 꽂힌다”며 “항의하러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혹시나 나도 뉴스 속 ‘층간 살인’의 당사자가 될까 두려워 매번 속으로만 삭이고 있다”고 털어놨다.
박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2000년대 초반에 지어진 오래된 아파트나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규모 빌라촌 곳곳에서 감정이 폭발하는 ‘층간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실제로 중앙SUNDAY가 국토교통부 자료를 바탕으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18년간 발생한 주요 층간소음 사건들을 정밀 분석한 결과 층간소음 분쟁은 단순히 개인의 예민함 탓이 아니라 ‘겨울철, 수도권 구도심, 낡은 거주지’ 등의 구조적 한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민원 2배 늘 때 ‘중재’는 반토막
…감정싸움→강력사건 번져
갈등은 이미 임계점을 넘어섰다.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공동주택 관리 주체에 접수된 층간소음과 간접흡연 민원은 51만2955건에 달한다. 특히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며 민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2020년 6만9703건에서 2024년 16만7492건으로 4년 새 2.4배나 폭증했다. 반면 관리 현장의 대응은 오히려 뒷걸음쳤다. 관리 주체가 민원 접수 후 세대를 방문해 확인하는 ‘현장 조사율’은 2020년 98.5%에서 2024년 54.5%로 반토막이 났다. 민원 두 건 중 한 건은 관리소마저 “개입해 봤자 욕만 먹는다”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셈이다.
차상곤 주거문화개선연구소장은 “국가나 지역사회의 중재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다 보니 이웃끼리 알아서 해결하려다 감정만 쌓이고 결국엔 끔찍한 강력 범죄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신고는 늘었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현실 속에서 갈등의 골만 깊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주목할 부분은 층간소음 분쟁에 특정한 경향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특히 중앙SUNDAY가 2008~2025년 발생한 층간소음 관련 살인·흉기난동 등 주요 사건 25건을 분석한 결과 이 중 72%(18건)는 서울 강북·서남권과 인천·부천 등의 노후 주거지 밀집 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건이 발생한 대부분의 아파트는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지어진 단지였다.
차 소장은 “2000년대 초반 우후죽순 들어선 1기 신도시 아파트의 경우 바닥 슬래브 두께 기준이 120~135㎜여서 최근 짓는 아파트(210㎜ 이상)와 비교할 때 태생적으로 소음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국민소득이 오르며 정숙한 주거 환경에 대한 욕구는 커졌지만 20년 전의 얇은 바닥은 달라진 생활 패턴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겨울’이란 계절적 요인도 갈등의 기폭제로 꼽힌다. 환경부 통계에 따르면 층간소음 관련 상담의 34%는 12~2월에 집중됐다. 소음측정기 대여업체인 ‘노이즈닥터’ 서경덕 대표는 “겨울철에 민원이 급증하는 건 현장에서도 확실히 체감된다”며 “창문을 닫아 소리가 실내에 갇히는 데다 추울수록 집을 ‘나만의 절대적인 휴식 공간’으로 여기는 심리가 강해지다 보니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줄게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아파트가 구조적 한계와 싸운다면 빌라와 다세대주택은 ‘중재자의 부재’와 씨름하고 있다. 서울 은평구 빌라에 거주하는 최모(35)씨는 이런 ‘사각지대’의 위험을 적나라하게 겪은 대표적인 사례다.
“새벽 2시만 되면 윗집 남자가 친구들을 불러 술판을 벌였어요. 아파트라면 경비실 인터폰이라도 하죠. 하지만 여긴 그런 게 없잖아요. 쪽지를 붙여도 찢어버리고. 결국 참다못해 올라가서 문을 두드렸는데 술 취한 남자가 나오더니 욕을 퍼붓더라고요. 그때 느꼈어요.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층간 살인이 이래서 벌어지는구나
….” 최씨는 “경찰에 신고해도 ‘원만히 해결하시라’며 가버리면 그만”이라며 “관리실이라는 완충지대가 없으니 이웃이 적으로 돌변하는 건 순식간”이라고 토로했다.
저층 거주자의 고통도 남다르다. 분석 결과 층간소음 분쟁의 20%가 1~3층에서 발생했다. 류종민 법무법인 선린 변호사는 “저층은 윗집뿐 아니라 외부 차량 소음이나 1층 현관문 소리 등이 중첩되는 곳”이라며 “소음에 대한 스트레스가 누적되면서 윗집을 향한 공격성도 더욱 커지게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현행법상 층간소음 피해자가 구제를 받기는 결코 쉽지 않다. 경범죄처벌법으로 신고해도 ‘고의성’ 입증이 어려워 10만원 이하 벌금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류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민사소송을 해도 관리실 민원 일지와 112 신고 내역, 정신과 진단서 등 구체적인 피해의 ‘증거’를 제시해야 법원도 인정해 주는 추세”라며 “하지만 당장 머리 위에서 쿵쿵거리는데 이성을 유지하면서 몇 달간 증거를 모으는 건 고문과도 같다는 게 피해자들의 공통된 하소연”이라고 말했다.
서 대표도 “측정치가 법적 기준을 넘는지도 중요하지만 결국 소음은 감정싸움”이라며 “처음엔 정중히 부탁하다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욕설이 오가고, 그때부터는 소음의 크기보다 ‘감정의 크기’가 물리적 충돌을 더욱 키우게 된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전문가들은 층간소음이 개인 간의 다툼을 넘어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돼버린 만큼 더 늦기 전에 제도적 개선책을 강구해야 할 때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도 ‘층간소음 제로’만 외칠 게 아니라 리모델링 지원이나 소음 저감 매트 시공 등 현실적인 완화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류 변호사는 “감정싸움이 살인으로 비화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명백하게 악의적인 소음 공세엔 강력한 제재 방안을 도입해 ‘공권력이 언제든 개입할 수 있다’는 확실한 신호를 주는 게 필요하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