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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적과 연방 시민 사이…내 정체성에 관하여 [왕겅우 회고록(40)]

중앙일보

2026.01.24 13:00 2026.01.24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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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출발 / Starting Over

이포에서 9개월이 빠르게 지나간 것은 내 주변에서나 중국에서나 변화가 빨랐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씩 중국의 급격한 상황과 거리를 두며 영국인들이 말레이 지도자들과 함께 만들려고 하는 새로운 말라야가 어떤 것이 될지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비상사태”가 지역 중국인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해하는 것이 1949년 상반기 동안 내 가장 큰 관심사였다.

1945-46년 항일부대들이 정글에서 걸어 나오고 말라야공산당 지지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운동을 시작하던 시절의 순진성을 나는 잃었다. 이제 말라야민족해방군(MNLA)은 중국에서 성공을 거둔 인민해방군(PLA)의 게릴라전쟁을 따라 펼치고 있었다. 중국공산당이 많은 노동자와 농민을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에 맞서 싸우도록 설득함으로써 막강한 군대를 키워낸 게릴라전략을 난징에서 지내는 동안 알게 되었다. 1948년 8월 형편없는 실패로 끝난 통화개혁 때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와 재정 파탄이 민심을 어떻게 무너트리는지도 경험했다.

그에 더해 삼민주의 필수과목을 통해 정치의 언어에 접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가르침과 초년의 교육에서는 애써 회피됐던 영역이다. 중국의 당시 상황 속에서 들은 그 강의를 통해 사회 발전을 위한 이상적 노선이라도 잘못 운영하면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배웠다. 선전의 책략에도 더 민감해졌다. 민족, 민주, 민생 같은 단어들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이념의 강한 힘을 그 강의로 알게 되면서, 정치활동가들이 권력의 획득과 강화를 위해 어떤 극단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지도 또한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제일 먼저 가르쳐주신 사실 하나는 비상사태로 인해 전 말라야의 중국인 학교에 정치적 압력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학사로서 아버지의 임무는 교육의 목표를 지키고 수업의 품질을 보장하는 학교들이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게 하는 것이었다. 교사의 훈련을 통해 늘어나는 교육 수요에 부응하는 교원 공급을 확보하는 것도 아버지가 중시한 일이었다. 주 내의 학교들을 정기적으로 시찰하면서 교장과 교사들, 그리고 이사회의 주요 참여자들과 대화를 나누셨다.

페락 주에는 공산당 총서기 친펭의 본부가 있었고 지지자들도 많았다. 중국인사회 지도자들의 살해사건이 자주 있어서 아버지가 벽지의 작은 학교에 시찰 가실 때는 어머니가 걱정이 많으셨다. 근처 소도시에서 묵어야 할 때가 더러 있었고, 그럴 때 어머니는 밤새 잠을 못 주무시기도 했다. 내가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부모님은 반대하셨지만 내가 우겨서 모시고 다녀온 일이 두 차례 있었다.

한 번은 남쪽의 비도르 부근 세 학교를 방문하고 타파에서 잤다. 큰길에서 벗어난 작은 마을 첸데리앙에 간 일이 생각나는데, 학교 부근의 아름다운 폭포를 구경했다. 공산당 활동의 소문이 있어서 영국 군인과 말레이 경찰이 지키는 검문소를 여럿 지나야 했다. 아버지는 무기 없이 호위 없이 다니는 편이 더 안전하다며 그런 식으로만 다니셨다. 그 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아버지는 학교 관계자들을 모두 찾아 만났는데, 불안을 느낄 일이 없었다.

몇 달 후에는 남쪽의 렝공과 그릭으로 모시고 간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몇 개 학교를 시찰하러 가시는 길이었는데, 태국 및 케다 주와의 경계에 가까운 크로(지금 이름은 펭칼란 훌루)의 학교도 그중 하나였다. 그릭에 갔을 때 그 바깥의 길은 안전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더 나가지 않고 그릭에서 묵었다.

먼 길인데 길 주변이 몇 개 고무농장 외에는 모두 정글이었다. 그런 곳에 중국인이 많이 사는 것이 놀라웠다. 주로 광시성 출신인데 점령기에 일본군에 대한 저항을 공산당과 함께 한 것이 아니라 국민당정부를 지지하는 애국활동으로 했다. 1949년까지 말라야민족해방군이 일부 병력을 태국 국경 가까이로 보내자 지역 중국인들은 말라야 군대를 도와 해방군과 싸우러 나섰다. 그릭에 중국인 학교 장학사가 찾아온 것이 전쟁 후 이번이 처음이며, 교사들의 헌신적 자세와 지역사회의 강력한 학교 지원에 감동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두 차례 출장을 다녀오며 페락 주가 얼마나 큰 곳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더 큰 깨달음은 내가 전과 달리 그곳에 소속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의 배합은 내가 중국으로 가기 전 자라날 때 환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를 외국인이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내게 특별한 점은 중국에서 대학을 다녔고 상황에 떠밀려 돌아온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사람들은 중국이 역사적 변화의 고비에 서 있음을 알고 있으며 자기네 장래의 고국은 말라야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하나 인상 깊은 일이 있었다. 두 차례 출장 중 새로 생긴 말라야중국협회(MCA)의 도움 받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MCA는 내 귀환 직후인 1949년 2월에 정식으로 결성되었는데, 나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정부의 보호를 바라는 사업가들의 활동으로만 생각했다. 그중에 국민당 편이 많았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을 적으로 여겼다. 다니며 보니 MCA 회원들은 지역 유지들이었고 교육사업의 후원자들이었다. 그들의 활동에 더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게 되었다.

어느 날 오후 페락 중국인상공회의소에서 MCA 회장 탄쳉록을 위해 연 리셉션에 아버지가 참석했을 때 일이 특별히 기억난다. MCA 발족 후 두 달이 된 1949년 4월이었는데 연설 중인 탄쳉록에게 공산분자들이 수류탄을 던졌다. 탄쳉록은 크게 다쳤으나 목숨은 건졌다. 아버지는 운이 좋았다. 자리가 폭발 장소에 가까웠는데도 다치지 않으셨다. 이 일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외 출장을 더 걱정하게 되셨다.

페락 주 남부와 북부를 한 차례씩 다니며 MCA가 속지주의(jus soli) 원칙의 채택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더 많은 지역 중국인이 연방 시민권을 갖게 해줄 원칙이었다. 정치적 과제는 공산당의 격파만이 아니라 말라야를 고국으로 삼고 싶어 하는 중국인들의 장래에도 걸려 있었다. 새 국가의 앞길에 놓인 어려움을 이해하는 데 이것이 또 하나 중요한 측면으로 떠올랐다.

아버지는 내가 말라야로 돌아온 후 내가 학업을 계속할 길을 궁리해 보셨는데, 현지 진학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교육계에 계셨기 때문에 싱가포르의 두 대학을 합쳐 하나의 대학교를 만들려는 영국 측 계획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내가 새 국가의 연방 시민이 된다면 새 대학에 들어가기 쉬울 것이라는 생각도 하셨다. 신청할 자격은 되지만 신청을 위해서는 중국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이런 생각을 공들여 해내면서 이제 그분이 마음에서 지워버린 것으로 보이는 중국으로부터 나를 돌려세울 마음을 굳히신 것을 알고 나는 놀랐다.

왜 그런 길을 생각하시게 되었는지, 전에 없던 정치적 판단을 하시게 되었는지, 설명하신 일이 없었다. 그분이 아끼시는 페락 주 중국인 학교들에 대한 말라야민족해뱡군의 위협이 중국의 부패한 국민당정부에 대한 환멸에 더해져 그런 방향으로 그분 마음을 굳혀 드린 것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다.

말라야대학 입학이 먼저 결정되고, 싱가포르로 떠나기 3주일 전인 9월 16일에 연방 시민권이 나왔다. 그때 나는 대학 공부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난징으로 가기 전에 기초 프랑스어를 공부했었고, 외국어학과에서는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했었다. 영국식 대학에서는 라틴어를 아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생각하셨다. 라틴어 가르쳐줄 사람을 찾아주시고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더 공부하라고 권하셨다. 가르치는 일에 겹쳐져 무척 바빴다.

알고 보니 싱가포르의 대학에서는 말라야 같은 복합사회에서 대부분 학생이 둘 이상 언어를 사용한다는 전제 아래 학생들에게 외국어를 따로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라틴어 공부를 그만두었으나 프랑스어와 독일어 공부는 독서 능력이 될 때까지 당분간 계속했다. 그리고 내 장바닥 말레이어의 부족함을 깨닫고 이 국가공용어 공부에 힘을 쏟았다. 인도네시아에서 나오고 있던 1945세대를 비롯한 문학작품 감상에 목표를 두었다.

1949년 10월 싱가포르로 떠나면서 이포에서 다시 살지 않게 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첫 여름방학에 잠깐 가 지냈고, 얼마 후 아버지가 쿠알라룸푸르로 발령받으셨다. 오랜 후 1960년대에야 이포에 가보게 되었는데 단 하루뿐이었다. 옛친구들은 모두 다른 곳에 가서 일하고 있었다. 뉴타운 거리를 걷다 보니 그곳에서 자라나던 시절에 늘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면서 얼마나 불안정하고 혼란된 생활을 했는지 기억났다. 영원한 것은 없고, 변화는 길모퉁이마다 기다리고 있고, 사람들은 쉽게 그 뿌리로부터 잘려 나갈 수 있다는 것이 내가 이포로부터 얻은 교훈이다.

1949년의 9개월 동안 나는 가족의 중국 귀환 계획이 무산된 후 삶의 새로운 전망을 세우는 데 몰두했다. 그러다 보니 자라나며 길든 전통과 의무에 대한 감각을 정신의 개방과 자유를 바라는 내면의 욕망과 대비시키게 되었다. 현대화를 시도하고 있던 오래된 문명과의 짧은 만남은 중국의 현실에 대한 신뢰감을 내게 주지 못했다.

또한 말라야에서 퍼져나가고 있던 종족과 민족에 관한 구호들도 내게는 허망하게 느껴졌다. 내게 확실한 것은 부모님의 사랑뿐이었다. 내 가장 소중한 재산인 공부의 의지도 그분들께 받은 것이었다. 어디 가든 새 친구들을 얻고 신뢰와 존중을 받는 것이 내가 바라는 바였다. 그를 위해서는 폭력과 전쟁보다 질서와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싱가포르로 떠나기 직전인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중국이 통일되고 새 중국이 태어난 것은 기뻤으나 내가 거기 끼지 못하는 것은 슬펐다. 내가 언제나 마음속으로는 중국인이라는 것, 그리고 부모님과 난징의 교수님들과 동료 학생들이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중국을 아끼는 마음을 잃지 않으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또한 중국 인민이 지난 반세기 동안 갈망해온 신중국의 장래가 잘 풀려나가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나는 말레이의 한 주에서 17년 가까이 살고 중국에서 18개월을 지낸 사람이었다. 그런데 양쪽을 아끼는 내 마음에는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복합사회의 매력도 컸지만, 전방위적인 중국의 문화적 흡인력 역시 깊고 강한 것이었다. 두 방향의 끌림이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고 그 양립이 내게 정상 상태가 되었다는 사실은 오랜 후에야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1949년에 새 말라야와 새 중국에 적응하려 노력하던 내 모습을 떠올리고 이포에서의 그 해가 내 새 인생의 전정한 출발점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곤 했다.


[Wang Gungwoo, 〈Home is Not Here〉(2018)에서 김기협 뽑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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