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짐을 진 백발의 후덕죽 셰프가 독기 서린 눈빛의 도전자를 내려다본다. 상대는 과거 후 셰프 밑에서 일했던 ‘부채도사(김태우 요리연구가)’. 칼을 든 부채도사가 먼저 움직였다. 날 선 공격이 몰아쳤지만 후 셰프는 뒷짐도 풀지 않은 채 공격을 피해냈다. 이윽고 후 셰프가 날린 단 한 번의 장풍에, 부채도사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고개 숙인 채 흐느끼는 부채도사를 후 셰프가 일으켰다.
대학생 박지수(25)씨가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2’ 속 에피소드를 애니메이션 스타일로 각색해 만든 영상의 한 장면이다. 약 2분 길이의 이 영상은 지난 3일 유튜브 채널 ‘스풉’에 업로드 된 후 조회수 105만회를 기록했다. 박씨는 “영상과 배경 음악 모두 AI(인공지능)의 힘을 빌려 만들었다”며 “후 셰프와 부채도사의 대결을 무협 영화처럼 그리거나 손종원 셰프를 바라보는 ‘요리괴물(이하성 셰프)’의 눈에 하트를 그려 넣는 등 원작엔 없지만 저변에 깔려있는 서사, 심리를 애니메이션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고 말했다.
AI 기술이 ‘팬 콘텐트’ 영역에서도 폭넓게 쓰이고 있다. 생성형 AI 프로그램들이 제작의 진입 장벽을 낮추면서 팬 콘텐트도 양적·질적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팬 콘텐트란 원작을 활용해 팬이 개인적으로 제작하는 비상업적 콘텐트를 뜻한다. 소설은 팬픽(Fan Fiction), 그림은 팬아트(Fan art), 잡지 형태의 출판물은 팬진(Fanzine)·팬매거진·동인지, 의상과 역할을 따라하는 코스프레(코스튬 플레이) 등이 있다. 최근 AI 기술과 결합되며 팬 콘텐트는 영상·노래 등으로 장르와 저변을 넓히고 있다.
지난해 11월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연인 퍼포먼스로 화제가 됐던 가수 화사와 배우 박정민의 ‘굿 굿바이’ 무대는 AI가 부른 박정민 버전의 ‘답가’로 재탄생했다. 유튜브 채널 ‘돌돌즈’는 지난달 2일 ‘박정민 이야기도 들어봐야지’라는 제목의 뮤직비디오를 올렸다. 굿 굿바이의 원곡은 그대로지만 남성 AI 보컬이 얹혔다. 가사 역시 변형됐다. 원곡은 ‘나 땅을 치고 후회하도록 넌 크게 웃어줘’지만 돌돌즈 버전에선 ‘나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만 널 떠나보낼게’ 등으로 바뀌었다. 영상은 조회수 134만회를 넘어섰다.
유튜브 채널 ‘뽕미더머니’는 AI로 힙합을 트로트로 재해석 하는 콘텐트들을 업로드했다. 가수 박재범의 ‘몸매’를 트로트 편곡한 이 영상은 지난달 초 공개된 후 조회수가 700만회를 넘어섰다. 이후 박재범이 멜론뮤직어워드(MMA), ‘더 시즌스-십센치의 쓰담쓰담’(KBS) 등의 무대에서 트로트 버전의 몸매를 부르며 더 큰 화제가 됐다. 뽕미더머니 채널 운영자 김모씨는 “나 역시 힙합을 오랫동안 즐겨온 사람”이라며 “좀 더 많은 분들이 어려워보이는 힙합을 편하게, 재밌게 즐겼으면 하는 마음에서 편곡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기획사에서 AI를 활용한 팬 콘텐트 창작을 장려하기도 한다. A2O엔터테인먼트는 팬과 아티스트가 원 콘텐트를 재해석하고 발표, 평가할 수 있는 ‘A2O존’, 크리에이터들이 AI를 활용해 콘텐트를 만들어내는 ‘AI콘텐트크리에이터 캠프’ 등을 운영하고 있다. A2O 측은 “팬들이 일차원적으로 콘텐트를 소비하는 것보다 직접 콘텐트를 만들며 아티스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커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AI를 활용한 팬 콘텐트 제작이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유진희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겸임교수는 “유튜브가 영상 유통 방식의 변화를 가져왔다면 생성형 AI는 제작의 변화를 가져왔다”며 “AI 기술로 팬 콘텐트 역시 창작의 문턱이 낮아졌고 인터넷과 SNS를 통해 팬덤이 생산한 콘텐트가 쉽고 빠르게 영향력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팬 콘텐트의 질과 양이 동시에 개선되며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팬픽으로 시작한 ‘그레이 50가지 그림자’ 시리즈, 영국 보이밴드 원 디렉션의 멤버인 해리 스타일스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진 팬픽이 영화로 이어진 ‘애프터’ 등 팬덤 콘텐트가 또 다른 원작이 되는 사례가 더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수만 A2O엔터테인먼트 키 프로듀서는 지난해 9월 중앙일보 글로벌 미디어 컨퍼런스에서 “팬들은 단순히 응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콘텐트를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아티스트의 브랜드와 아이덴티티를 함께 구축하고 있다”며 “앞으로 AI 기술은 이 과정을 더욱 빠르고 손쉽게 만들어 누구나 음악을 작곡하고, 영상을 편집하고 무대를 기획하는 ‘프로슈머’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다만 원작자와의 법적 분쟁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박근익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 사업국 팀장은 “원작자 허락 없이 원 저작물의 변형이 수반되었다면 저작권법 침해 소지가 있고 동의 없이 유명인의 목소리·초상 등 인격표지를 사용했다면 인격권·퍼블리시티권 등을 침해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팬 콘텐트로 경제적 가치가 발생했다면 유명인의 고객 흡입력을 무단 이용했다는 이유로 부정경쟁방지법을 위반했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유진희 교수는 “현실적으로는 일반인들이 일일이 원작자의 허락을 구하고 팬 콘텐트를 제작하는 것도, AI 기술의 발전을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며 “기존의 저작물의 브랜드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는다면 개개인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방식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