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초에 이어 올해도 벽두부터 2년 연속으로 ‘위기론’을 꺼내 들었다. 지난해엔 반도체 실적 부진 속에서 ‘사즉생(死卽生)’ 각오를 독려했다면, 이번엔 인공지능(AI)발 반도체 초호황이 예견된 가운데 자만을 경계하고 기술 개발에 매진해야 한다는 경고 메시지다. 그것도 더 맵고 강렬한 ‘직설 화법’이었다.
25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그룹은 이달 20일부터 경기도 용인 삼성인력개발원에서 임원 대상 세미나를 진행 중이다. 다음 달 말까지 전체 2000여 명의 계열사 임원을 호출해 ‘정신 재무장’을 강조하는 자리다. 지난해엔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이라는 주제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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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타석 얻어맞을 수 있다” 위기감
참석자들은 지난해보다 질문이 더 집요해졌고, 내용도 보다 구체적으로 바뀌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특히 ‘지금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는 수준의 직설적인 문제제기가 있었다고 한다. 교육에 참석했던 A임원은 “‘29일 SK하이닉스가, 30일(한국시간)엔 애플이 경영 실적을 공개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반도체와 스마트폰에서) 연타석으로 얻어맞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며 “강의장 분위기는 한마디로 ‘바보야. 지금 삼성이 잘하는 거 하나도 없다’였다. 내내 정적 속의 긴장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원천 기술을 확보한 미국, 무서운 기세로 밀어붙이는 중국 사이에서 잘하는 게 없다’는 지적도 담겼다. 실제로 교육 영상에는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이 2007년 언급한 ‘샌드위치론’이 소환됐다. 미국·일본의 기술에 밀리고, 중국의 가격 공세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을 수 있는 구조를 짚은 것이다. AI 시대에는 중국의 진격이 더 무섭다는 인식도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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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세계 1위’ 빼앗기는 건 시간 문제”
조직문화 쇄신 필요성에 대한 직설적인 지적도 이어졌다. 가령 ▶품질 문제를 알면서도 관행적으로 눈감는 분위기는 아닌지 ▶실패를 두려워 해 도전을 머뭇거리지 않는지 ▶AI 기술을 보유하고도 활용도는 왜 이렇게 낮은지 등이다. 임원들 사이에선 ▶중국 TCL와 일본 소니가 합치면 삼성의 ‘20년 연속 TV 1위’를 빼앗기는 건 시간문제다 ▶(SK하이닉스와 견줘) 우리가 진짜 1등인가, 6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 4)에선 앞설 수 있는가 같은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이 회장의 메시지는 제3자가 내레이션하는 방식으로 전달됐다고 한다. 또 다른 참석자 B임원은 “영상을 통해 ‘숫자가 나아졌다고 자만할 때가 아니다.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이 회장의 현실 인식이 공유됐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실상 이 회장의 신년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어진 사장단 만찬도 무거운 분위기에서 마쳤으며, 특히 ‘숫자의 환상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이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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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착시 경계…사실상 이재용 신년 메시지
메모리 경쟁력에 힘입어 삼성전자는 올해 사상 최대인 100조원대 영업이익을 거둘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AI 반도체’로 불리는 HBM 기술력에서 SK하이닉스에 뒤처지며 ‘반도체 초격차’ 주도권을 내줬다고 평가받는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는 지난해 시장 점유율이 7%에 그쳤다. 세계 1위 TSMC(70%)와 격차가 10배로 벌어졌다. 올해 영업이익 100조원 전망치는 AI 열풍에 따른 ‘착시’이며, 근본적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는 이 회장의 경고가 나온 배경이다.
세미나에 참석한 임원들에게는 각자의 이름과 함께 ‘위기를 넘어 재도약으로’라는 문구가 새겨진 크리스털 패가 전달됐다. 지난해 크리스털 패에는 ‘위기에 강하고 역전에 능하며 승부에 독한 삼성인’이라는 메시지가 적혔다. 올해는 실행과 성과로 삼성의 저력을 다시 증명하자는 의미를 담았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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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격차 회복, 관료주의 극복 과제”
송재용 서울대 석좌교수는 “전영현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장(부회장)이 ‘반성문’을 쓸 정도로 위기에 몰렸던 삼성의 지난해 최대 실적은 AI 업황 덕을 본 측면이 있다”며 “기술 초격차 회복, 관료주의 극복 등 구조적 과제는 여전한 상황에서 이 회장이 절박한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기찬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사법 리스크 등 경영환경 제약 속에서 이 회장은 수치와 관리 지표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며 “이 과정에서 조직의 도전 의지와 실험 문화가 위축된 측면이 있다. 이제는 숫자를 넘어 사람과 조직의 창의성을 얼마나 끌어올리느냐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