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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 여왕’이 말했다, 올림픽 진짜 모른다고

중앙일보

2026.01.25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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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동계올림픽 D-11

20년 전 토리노 올림픽(아래 사진)에서 3관왕에 오른 진선유는 고이 보관한 금메달을 들고 후배들을 응원했다. 김종호 기자
20년 전 겨울, 한국인들은 빙판을 가르는 한 소녀의 질주에 매료됐다. 작은 체구에도 폭발적인 스피드와 힘으로 상대의 틈을 파고들던 ‘고교생 샛별’ 진선유(38).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전무후무한 여자 쇼트트랙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던 그를 최근 태릉선수촌 국제빙상장에서 만났다.

진선유는 선배 전이경(50)의 계보를 잇는 한국 여자 쇼트트랙의 상징적 존재다. 토리노 대회 당시 1500m와 3000m 계주, 1000m를 석권하며 한국 여자 쇼트트랙 사상 첫 3관왕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당시 한국은 남자부 3관왕 안현수(41)의 활약까지 더해 금메달 6개로 종합 7위라는 성적표를 거머쥐었다.

이번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밀라노는 20년 전 영광의 토리노에서 2시간 거리다. 진선유와의 대화는 자연스레 20년 전 토리노의 추억으로 흘러갔다.

그는 “토리노는 경기장부터 대기실까지 20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나 당시 느꼈던 압도적인 위압감은 사라지고 빙판이 유독 작게만 느껴지더라”며 웃었다. 이어 “그래도 심장이 요동쳤다. 열여덟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이곳에서 참 큰일을 해냈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했다”고 회상했다.

토리노의 영광은 그를 단숨에 국민 스타로 만들었다. 입국장 문이 열리는 순간 쏟아지던 무수한 플래시 세례는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환희는 짧았다. 당시 빙상계는 한국체대와 비(非)한체대 출신들 사이의 파벌 싸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소속에 따라 지도자와 선수가 갈라져 훈련하고, 같은 태극마크를 달고도 서로를 견제하던 비정상적인 상황. 고교생 진선유는 이 거대한 갈등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

그는 “당시 파벌 문제로 선수들은 축하 대신 비난의 화살을 맞아야 했고, 마치 죄인처럼 숨죽여 지내야 했다”고 털어놨다. 세계 정점에 올랐다는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어린 선수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가혹했던 어른들의 싸움 속에 토리노의 겨울은 그렇게 시리게 저물어갔다.

진선유. [중앙포토]
3관왕의 여운 역시 길지 못했다. 부상과 빙상계 안팎의 풍파 속에 그는 이른 은퇴를 택했다. “오른쪽 발목 안팎의 인대가 모두 파열됐다. 박수 칠 때 떠나고 싶어 2011년 스물셋의 나이로 스케이트 날을 벗었다.”

은퇴 직후 모교 단국대에서 지도자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벌써 15년 차 베테랑 코치다.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 2관왕 박지원(30)을 비롯해 김태성(25), 김건희(26)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지난해 5월에는 가정을 꾸리며 인생의 새로운 막도 열었다.

전설이 떠난 뒤에도 한국 쇼트트랙은 세계 최강을 지켜왔지만, 이번 대회를 앞둔 시선은 사뭇 차갑다. 캐나다, 미국, 네덜란드의 강세 속에 ‘역대 최약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베테랑 최민정(28)과 신예 김길리(22), 임종언(18) 등이 고군분투 중이지만 객관적인 전력 차를 무시하기 어렵다.

진선유 역시 냉철했다. “솔직히 전력상 우위는 아니다. 외국 선수들의 속도와 체력이 워낙 좋아져 예전과 달리 장거리에서도 지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기술은 여전히 세계 최고다. 결국 전략 싸움이다. 초반 레이스에서 밀리지 않는 영리한 스케이팅을 구사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내다봤다.

인터뷰 끝자락, 그는 후배들을 향한 따뜻한 격려를 잊지 않았다. “토리노 때 첫 종목인 500m에서 탈락하자 집 앞을 지키던 기자들이 전부 철수했다고 하더라. 하지만 남은 종목을 싹쓸이하며 3관왕이 됐다. 올림픽은 그런 것이다. 끝까지 가보기 전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이어 “어려운 시기지만 경험 많은 (최)민정이가 중심을 잘 잡아줄 거라 믿는다. 후배들이 그저 자기 자신을 믿고 후회 없이 빙판을 지쳤으면 좋겠다”고 응원했다.





고봉준([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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