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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 1월 수상작] 팩! 하고 토라지더라도…소재도 표현도 재치 넘쳤다

중앙일보

2026.01.2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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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팩 하는 날
김은희

반쯤 웃던 허탈 위에 젖은 가면을 씌운다
속눈썹 내려앉는 말들이 오므린 시간
고단한 한낮의 잡티 물광으로 채운다

팩! 하고 토라지던 뾰족한 옹이들과
아닌 척 숨어 있던 얼룩을 밀어내고
갓 만든 연두부 같은 그 여자가 되고 싶다

◆김은희
경북 문경 출생. 중앙시조백일장 차상(2022), 중앙시조백일장 차하(2023~2025). 대구시조시인협회 전국시조공모전 차상(2025)

차상
스프링 달력
백관승

오지 않아 기다리는 시작을 모셔놓고
첫 장의 야무진 꿈 잘 보이게 놓을 때
스프링 꼭 잡은 날들 새 옷처럼 걸린다

하나씩 골라 가며 약속으로 돋은 날짜
낯가림은 얇아져 한 발 더 앞서 가면
돌아와 멀쩡해진 봄 자소서를 고쳐 쓴다

열두 번 변한 얼굴 또다시 따뜻해져
립밤을 바른 입가 말마다 반짝인다
딱 맞는 질문 앞에서 날개가 꿈틀댄다

차하
갯벌의 저녁
이현주

바람 하나 다가와 바다를 더듬는다
가슴에 담았다가 가만히 놓아 준다
갓바다 작업의 흔적 아직 남아 있는데

노을 지는 갯골에 석양의 여운 남아
닳고 닳아 뭉툭해진 끌개를 비춘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빠져나간 흔적을

코끝에 감도는 짭조름한 바다 냄새
스멀스멀 밀려들면 긴 숨을 모은다
남은 마음을 헹구어서 두려고

이달의 심사평
새해, 중앙시조백일장에 응모하시는 분들의 작품들과 만나는 일이 무엇보다 반가운 1월이다.

1월 장원에 김은희의 ‘팩하는 날’을 올린다. 일상에서 건져 올린 남다른 소재를 군더더기 없이 두 수에 잘 녹여냈다. 얼굴에 팩을 붙이는 과정에서 “허탈” “고단”함을 “물광으로 채”우는 반면, “뾰족한 옹이”를 “밀어내”는 내면의 성찰이 보이기도 한다. 둘째 수의 재치 있는 시적표현들이 신선했으며, 시어를 다루는 현대적 감각이 돋보였다. 담금질한 시간을 가늠케 한, 함께 보내온 작품들도 고른 편이라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차상에는 백관승의 ‘스프링 달력’을 앉힌다. ‘스프링 달력’은 “자소서” 쓰기를 반복하는 이 시대 청춘들의 고단함으로 읽힌다. 작품의 제목에서도 유추되듯이 “봄”을 좇는 화자의 “야무진 꿈”이 패기 있게 다가왔다. 누구나 공감할 법한 사회적 문제를 이끌어낸 점, 셋째 수에서 “말마다 반짝인다” “날개가 꿈틀댄다” 등 시종일관 긍정 에너지가 돋보이는 작품구성이 활달했다.

차하에 이현주의 ‘갯벌의 저녁’을 선했다. “바다”, “바람”, 화자가 자연스럽게 교감하는 ‘갯벌의 저녁’은 각 수마다 시상 전개가 섬세하고 안정감이 있다. 그러나 흔한 표현과 낡은 소재는 창작 과정에서 지양해야 할 것이다. 나만의 새로운 감각과 서정의 깊이에 신경 쓰면 작품이 한층 더 좋아질 것이란 생각이다.

심사위원 이송희·이태순(대표집필)

초대시조
벽화
김하정

양지바른 곳으로 나와 앉은 할머니들
담벼락에 무채색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든 빛바랜 점묘들

주름을 말리느라 햇살들 분주하고
희미한 배경색으로 기억들이 다가오면
한때는 꽃이었던 시절 대낮처럼 환하네

허공을 응시하는 뜨거운 눈빛이여
수없이 그리고 색칠하고 싶은 그 자리
지금은 여백 속으로 새들이 날고 있다

◆김하정
경남 함안 출생. 창원국립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202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시집 『파피루스가 일러스트에게』(2025)

새해를 맞이하여 맨 처음 초대하는 시조는 따뜻하고 다정한 한 폭의 풍경화 같은 김하정 시인의 ‘벽화’다. 고요해서 더 부산한 고향 동네를 걷다 보면, 꽃이며 인물이며 사람살이의 풍경을 담아낸 그림들이 골목을 장식하고 있다. 그림 앞에 긴 나무 의자 하나 놓여있고 햇살이 따스해지면 노인들이 나와 앉아 담소를 즐긴다. 꽃 같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속 썩이는 영감님 흉을 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끝내는 자손들 이야기로 애틋해진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도화지에 점과 선과 색으로 그림을 그리는 존재들이다. 빛나는 명작을 그리고자 하는 마음은 다 같겠지만 삶은 의도대로 흘러가지 못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벽을 등지고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는 대상들을 주목하고 있다. 그 바닥 지표식물처럼 질기게 삶을 살아낸 그분들은 측은지심의 대상이 아니라 감탄의 대상이며, 수만 권 그림책을 엮어낸 기억들과 더불어 거센 파고를 온몸으로 헤쳐 나온 인생의 선장들임을 알기 때문이다. “새들이 날고 있는” 흰 여백을 꽉 채울 그림의 마무리는 찬란한 무지갯빛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길 빌어 본다.

시조시인 강정숙

◆응모안내
매달 18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email protected])으로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도 받습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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