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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외교’ 큰 별 공로명 별세…“후배들이 가장 존경한 외교관”

중앙일보

2026.01.25 07:39 2026.01.25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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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명 전 외교부 장관이 2019년 1월 2일 서울 종로구 신교동 동아시아재단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김상선 기자
한·일 수교, 남북 협상, 한·소 및 한·중 수교. 한국 역사에 외교라는 게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중요한 고비마다 현장을 지킨 큰 별이 졌다. 공로명 전 외교부 장관이 25일 향년 94세로 별세했다.

고인이 이끌었던 동아시아 재단 관계자는 이날 “오랫동안 병석에 계셨던 공 전 장관이 오늘 오후 노환으로 별세하셨다”고 전했다. 고인은 슬하에 아들 둘을 뒀다. 빈소는 연세대 신촌 세브란스병원이며, 조문은 27일부터 가능하다.

1958년 외무부에 입부한 고인은 입부 직후 주미 대사관과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한 뒤 외무부 동북아과장, 외무부 아주국 심의관, 외무부 아주국장을 지냈다. 이어 90년 초대 소련 대사로 부임했다. 92년 남북핵통제공동위원장 및 남북고위급회담 대변인을 맡은 뒤 93~94년 주일 대사를 역임했다. 94~96년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고인은 대일 외교와 대중 외교, 대러 외교를 두루 다루며 한국 외교의 중요한 분야를 모두 섭렵한 거목이었다. 65년 한·일 협정 체결 당시 공 전 장관은 외무부 동북아과에 근무하며 실무자로서 회담에 참여했다.
공로명(왼쪽) 당시 외무부 차관보가 1983년 5월 중국 민항기 피랍 사건을 해결하고 선투 중국 대표와 합의문서를 교환하고 있다.

그의 대표 업적은 북방외교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83년 중국 민항기 납치 사건 당시 외무부 정무차관보로서 한국 측 협상 수석대표를 맡았는데, 한국이 중국 당국과 정부 간 협상을 벌인 건 49년 이후 처음이었다. 공 전 장관은 국제법 원칙에 따라 사태를 해결했고, 이는 한·중 수교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평가다. “평화통일을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그 전 단계는 남북한에 대한 교차승인을 이루는 것이고 그에 앞서 중ㆍ소와 접근을 추진해야 한다”는 그의 정책 제안서가 북방외교의 단초가 됐다. 그는 이후 소련 초대 영사처장을 맡아 1990년 한·소 수교를 이끌었다.


공 전 장관은 외교안보연구원장 재직 시절인 1990년대 초반 남북핵통제공동위원장으로서 반기문 당시 부위원장과 함께 북한과 직접 핵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북한과의 협상을 돌아보며 “북측 수석대표는 안위가 걱정되는지 평양 들으라는 듯 판에 박힌 말만 되풀이했다. 공로명 위원장이 ‘평양 쪽을 바라보지 말고 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고 돌아봤다. (공 전 장관 구순 기념 문집『공로명과 나』) 공 전 장관이 장관 재임 시절 그의 보좌관을 지냈던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1995년 유엔 총회 기조연설을 통해 북한 인권 문제를 처음 제기하신 인물이시기도 하다”고 말했다.
공로명 당시 외무장관이 1995년 6월 13일 오전 콸라룸푸르 북-미 경수로협상 타결과 관련해 외무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표준형 경수로 노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배짱 있는 협상가로서 그의 면모는 미국을 상대로도 드러났다. 임성준 전 캐나다 대사가 『공로명과 나』에 적은 내용이다. 1994년 북·미 간 제네바 합의 이후 후속 조치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한국형 경수로’를 거부하며 미국형 경수로 제공을 고집했다. 당시 장관이었던 고인은 이 문제로 한국을 설득하러 오는 미 대표단을 만났다. 미 측이 합의문 초안을 읽자 “미국은 어떻게 동맹국의 팔을 비틀어 자기네 입장을 관철시키려 하는가. 오히려 북한의 팔을 비틀어서라도 한·미 간 입장을 관철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호통을 쳤다. 면담은 무거운 분위기에서 끝났지만, 이후 실무 협상에서 우리 측 입장을 반영한 경수로 공급안이 합의됐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부당한 사유로 외무부 장관직을 내려놓은 공 전 장관은 오히려 퇴임 뒤 더 활발한 활동으로 한국 외교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퇴임 당시 이기주 차관이 대독한 이임사에서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인용해 “‘지나간 일은 고칠 수 없음을 깨닫고, 앞으로 오는 인생을 쫓아야 함을 알았다’고 한 심경으로 표표히 떠나고자 한다”고 해 회자되기도 했다.

고인은 생전 후배들에게 “항상 깨어 있으라”는 조언을 자주 했다고 한다. 공 전 장관은 “아시아대륙 동북단의 반도에 속하는 우리 한국은 항상 우리보다 크고 강대한 이웃과 평화롭고 안정된 여건 하에서 어떻게 생존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라는 고민에 천착해 왔는데(저서 『나의 외교 노트』), 강대국 사이에 낀 나라의 외교관으로서 잠드는 것도 사치라는 취지였다고 한다. 미국, 일본, 중국, 옛 소련 등 주변의 강대국은 모두 상대해본 그가 한 말이기에 이 말이 더 기억에 남는다는 후배들이 많다. 공 전 장관은 외교관의 무기는 총이 아니라 말과 논리라는 말도 자주 했다.

신각수 전 대사는 “고인은 한국 외교사의 지축을 고수하며 중국 민항기 납치 사건으로 시작해 한·소 관계의 문을 열고 북핵 외교 등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며 “후배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던 외교관”이라고 돌아봤다. 이용준 세종재단 이사장은 “한국 외교의 가장 큰 별이 졌다”고 말했다.

가장 존경받던 외교관, 큰 별이라는 평가가 과장이 아니라는 건 지난 2021년 공 전 장관의 구순을 맞아 출간된 기념 문집 『공로명과 나』에 외교관과 학자, 언론인, 일본 측 인사까지 50여명이 넘게 참여한 데서도 알 수 있다.

태평양아시아네트워크(PAN)집행위원회가 1998년 11월 27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렸다.(左로부터) 김상철,공로명,아키노,박영주,달림플,오가사와라씨.

온갖 강대국을 다 상대한 협상가로서 공 전 장관은 늘 “소탈, 경청, 공감, 진솔한 설득을 기반으로 소통했다”고 김건 전 주영대사(현 국민의힘 의원)는 문집에서 되돌아봤다.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할 때 오히려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고, 표현은 더욱 정중하게” 했다는 것이다. 윤덕민 한국외대 석좌교수(전 주일 대사)는 “주변 모두를 편안하게 하는 인품과 그 인품으로 인한 협상력은 아무나 범접할 수 없다. 외국 외교관들은 그를 평가할 때 군계일학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했다.

공무로 고인과 여러 차례 함께 한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 전 주한 일본 대사는 문집에서 공 전 장관을 이렇게 기억했다.

“일본 외교관의 무례한 발언에 공 장관은 천천히 일어나 침착하게 방을 나가버렸다. 그때의 공 장관의 뒷모습이랄까, 나가는 모습에 들어 있는 냉정함이랄까, 그러면서도 어딘가 타오르는 애국의 불꽃을 숨긴 듯한 그 엄숙함은 지금까지도 눈에 선하다.”






유지혜.윤지원([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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