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수교와 북방외교 등 지난 60여 년간 한국 외교사에서 중요한 고비마다 현장을 지킨 공로명(사진) 전 외교부 장관이 25일 94세로 별세했다. 고인이 이끌었던 동아시아재단 관계자는 이날 “오랫동안 병석에 계셨던 공 전 장관이 오늘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고 전했다. 고인은 슬하에 아들 둘을 뒀다.
1958년 외무부에 입부한 고인은 입부 직후 주미 대사관과 주일 대사관에서 근무한 뒤 외무부 동북아과장, 외무부 아주국 심의관, 외무부 아주국장을 지낸 뒤 90년 초대 소련대사로 부임했다. 92년 남북핵통제공동위원장 및 남북고위급회담 대변인을 지낸 뒤 93~94년 주일대사를 역임했으며 94~96년 외무부 장관을 지냈다. 고인은 대일 외교와 대중 외교, 대러 외교를 두루 다루며 한국 외교의 중요한 분야를 모두 섭렵한 거목이었다. 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공 전 장관은 외무부 동북아과에 근무하며 실무자로서 회담에 참여했다.
그의 대표 업적은 북방외교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83년 중국 민항기 납치 사건 당시에는 외무부 정무차관보로서 한국 측 협상 수석대표를 맡았는데, 한국이 중국 당국과 정부 간 협상을 벌인 건 49년 이후 처음이었다. 공 전 장관은 국제법 원칙에 따라 사태를 해결했고, 이는 1992년 한·중 수교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평가다. “평화통일을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하는데 그 전 단계는 남북한에 대한 교차승인을 이루는 것이고, 그에 앞서 중·소와 접근을 추진해야 한다”는 그의 정책 제안서가 북방외교의 단초가 됐다. 그는 이후 소련 초대 영사처장을 맡아 1990년 한·소 수교를 이끌었다.
공 전 장관은 외교안보연구원장 재직 시절인 1990년대 초반 남북핵통제공동위원장으로서 반기문 부위원장과 함께 북한과 직접 핵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공 전 장관이 장관 재임 시절 그의 보좌관을 지냈던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1995년 유엔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처음 거론하신 인물이시기도 하다”고 말했다.
고인은 생전에 후배들에게 “항상 깨어 있으라”는 조언을 자주 했다고 한다. 공 전 장관은 “아시아 대륙 동북단의 반도에 속하는 우리 한국은 항상 우리보다 크고 강대한 이웃과 평화롭고 안정된 여건하에서 어떻게 생존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라는 고민에 천착해 왔는데(저서 『나의 외교 노트』), 강대국 사이에 끼인 나라의 외교관으로서 잠드는 것도 사치라는 취지였다고 한다. 외교관의 무기는 총이 아니라 말과 논리라는 말도 자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