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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강국 이뤘으니 백범의 남은 소원, 이제 정치만 잘하면 된다" [월간중앙]

중앙일보

2026.01.25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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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사람] 백범 증손자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말하는 할아버지의 꿈

“문화는 전쟁 막는 힘”… 〈나의 소원〉에서 제시한 독립 이후 국가상 현실로
김구 탄생 150주년, 유네스코 ‘기념해’ 공식 지정… “간디·만델라 반열 오른 것”

백범 김구 선생의 증손자인 김용만 의원은 백범에 대해 “더 좋은 나라를 꿈꿨던, 독립 후 문화 국가의 방향성까지 제시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같이 기억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최기웅 기자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

최근 K-문화가 글로벌 인기를 얻으며 독립운동가이자 문화강국을 꿈꿨던 백범 김구 선생의 이름이 호출되는 일이 잦아졌다. 세계 무대에서 대한민국의 문화적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는 기사마다 ‘밈’처럼 달리는 댓글 때문이다. 백범이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밝힌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는 문장에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100년 후 미래를 내다보는 그의 통찰이 담겨 있다.

마침 올해는 백범 김구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다. 동시에 유네스코가 올해를 ‘기념해’로 공식 지정하면서 백범은 한국 근현대사 안에만 머무는 인물이 아니라, 인류 보편의 가치와 사상을 남긴 세계사적 인물로 부상했다. 지난 1월 13일 국회의원회관 815호에서 만난 백범의 증손자 김용만 더불어민주당 의원(경기 하남시을)은 유네스코의 기념해 지정에 대해 “지금껏 간디, 만델라 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대상으로 기념해가 지정된 것으로 안다”면서 “자부심과 함께 부담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 의원은 ‘백범의 후손’이라는 무게를 안고 22대 총선을 통해 정치에 발을 들였다.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이후 국내로 돌아와 서울시와 협업해 보훈·역사 분야를 오랫동안 담당해왔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독립운동사와 역사 왜곡의 현장을 목도했다. 특히 백범의 묘소를 비롯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군사부장 조성환, 비서부장 차이석, 윤봉길·이봉창·백정기의 묘소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지가 있는 효창공원의 가치를 축소하고 폄훼하려는 뉴라이트계 단체들의 지속적인 시도가 그를 정치판으로 불러내는 계기가 됐다.

백범의 문화사상과 문화적 활동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현재의 정치 현실로 이어졌다. 이념의 이름으로 분열을 부추기는 흐름 속에서 김 의원은 백범이라면 ‘나라를 먼저 생각하라’고 꾸짖었을 것이라고 했다. 역사에는 진보와 보수가 없고, 통합과 국익이 기준이 돼야 한다는 백범의 메시지는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김 의원과의 인터뷰는 백범의 사상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 던지는 화두부터 지금 우리가 어떤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무엇을 바로 세워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Q : 백범 탄생 150주년이자 유네스코의 ‘기념해’ 공식 지정까지, 올해의 시작을 특별하게 맞이했을 듯하다.
A : “가족으로서 당연히 기쁜 소식이다. 국내에선 이미 큰 인물로 인식됐지만, 이번 유네스코의 기념해 지정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백범 김구 선생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과거 유네스코 기념해로 지정된 인물들을 보면 마하트마 간디나 넬슨 만델라 같은 분들인데, 백범 선생도 탄생 150주년에 맞춰 그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국가적으로도 기쁜 일이지만, 후손으로서는 자부심을 느끼는 동시에 책임감과 부담도 함께 느끼게 된다.”


Q : 어떤 부담인가?
A : “국제적인 인물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분의 후손으로서, 또 공인으로서 살아가다 보니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더 엄격하게 돌아보게 된다.”



백범이 원했던 문화 강국 꿈 이뤄


Q : 유네스코가 백범을 ‘픽’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A : “유네스코가 강조하는 보편적 가치에 맞닿아 있기 때문 아닐까. 백범이 반복적으로 강조하신 것이 인의, 자비, 사랑이다. 이는 문화의 핵심축이기도 하다. 유네스코가 몬디아컬트를 통해 문화정책에 대한 논의와 정의를 내린 것이 1982년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1차 회의 때로 알고 있다. 백범은 이미 1940년대에 〈나의 소원〉을 통해 문화에 대한 본인의 이념과 사상을 분명히 밝혔다. 어찌 보면 유네스코보다 훨씬 앞서 문화의 개념을 정의한 셈이다. 그래서 백범의 사상이 유네스코의 정의에 부합한다고 보기보다는, 오히려 백범이 이미 갖고 있던 가치에 맞춰 이후 국제사회가 문화의 정의를 정리해 나갔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


Q : 그토록 바라던 문화 강국의 꿈을 이룬 것 같은 요즘 후손들을 하늘에서도 기특하게 여기실 것 같다.
A : “지금 대한민국은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분명히 기뻐하셨을 것이다. 실제로 국민도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댓글을 보면 “백범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라는 표현이 많다. 그만큼 백범이 꿈꿨던 나라의 모습에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본다.”


Q : 문화 수준에 비해 한국 정치는 아직 ‘하수’라는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A : “국민 대부분이 ‘이제 정치만 잘하면 돼’라는 말을 하시는데, 맞는 말이다. 과거에는 정치권이 문화 활동의 발목을 잡은 적도 있었다. ‘블랙리스트’처럼 정치적으로 불편하다는 이유로 특정 문화 활동을 저해하거나 예산을 삭감한 사례도 있었다. 그런 시기를 지나 이제는 정치권이 생각을 고쳐먹어야 한다고 본다. 이제는 민간에서 이미 만들어낸 성과를 인지하고, 정책과 예산으로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한다. 지속가능한 문화 강국을 만들려면 문화예술인들의 처우 문제, 저임금과 불안정한 고용 환경도 반드시 개선해야 할 과제다.”

김용만 의원실 출입분에 적힌 ‘신친일파 척결 뉴라이트 거부’는 김 의원이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최기웅 기자


백범의 독립운동은 목적이 아닌 수단


Q : 정치인이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무엇이었나?
A : “원래는 보훈과 역사 분야 일을 해왔다. 2015년 광복 70주년을 계기로 박원순 시장 재임 시절부터 관련 업무를 맡아왔다. 그 과정에서 역사 왜곡에 대한 문제의식이 커졌다. 그러면서 정치권에서도 자연스럽게 저를 인지하게 된 것 같다. 20대 대선 당시 이재명 후보로부터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고, 영입 인재로 참여하게 됐다. 이후 22대 총선 준비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됐다.”


Q : 어떤 종류의 역사 왜곡이었나?
A : “많았다. 위안부 합의, 국정교과서 논란, 건국절 주장 같은 일들을 보며 왜 이렇게 역사 인식이 왜곡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특히 ‘뉴라이트’계가 주장하는 내용은 모두 말도 안 되는,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효창공원처럼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공간이 의도적으로 평가절하되어 온 과정도 문제였다. 이런 문제를 보며 정치권에 들어가 직접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Q : 의원실 출입문에 뉴라이트를 경계하는 문구가 붙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A : “원래 뉴라이트 계열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주 극소수였다. 자연 소멸 단계에 가까웠던 집단이었는데, 특정 권력자들 근처에서 권력을 등에 업으면서 마치 큰 세력처럼 보이게 됐다. 말에 힘이 실리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왜곡된 역사 인식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기 위한 조건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역사는 진보나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국익과 사실의 문제다. ”


Q : 백범을 공산주의자 혹은 공산주의 옹호 인물로 보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A : “백범은 민족주의자였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이 분명했다. 광복 이후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남북 통합을 주장했던 것을 왜곡해 그런 프레임을 씌운 것이다. 외세에 의해 한반도가 갈라지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지, 공산주의를 옹호한 것이 아니다. 이런 왜곡은 꼭 바로잡아야 한다.”


Q : 젊은 층에선 백범을 그저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는데, 후손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A : “그 점이 늘 아쉽다. 백범에게 독립운동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다. 그가 왜 독립운동을 했는지, 독립 이후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었는지를 함께 봐야 한다. 백범은 문화 강국을 꿈꿨다. 경제력이나 국방력도 중요하지만,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힘은 결국 문화라고 보셨다. 전쟁할 이유가 없는 나라, 다른 나라들이 우리를 상대로 전쟁을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드는 나라를 꿈꾸셨다. 단순히 독립운동가 백범이 아닌, 결국은 더 좋은 나라를 꿈꿨던, 독립 후 문화 국가의 방향성까지 제시한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을 같이 기억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다.”


Q :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새기고 있는 백범의 말이 있다면?
A : “제 방에도 걸려 있는 문구인데, 득수반지무족기(得樹攀枝無足奇) 현애철수장부아(懸崖撤手丈夫兒)로, 해석하면 ‘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은 가히 장부로다’가 된다. 올바른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백범도 그런 마음으로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고 알고 있다. 저 역시 그 자세를 삶의 기준으로 삼으려 한다.”

초선 의원인 김용만 의원은 정계에 발을 들였던 초심을 잊지 않고 독립운동계와 보훈계의 정상화를 위해 힘을 보태는 것이 목표다. 최기웅 기자


가족이 기억하는 인간 김구는 ‘냉철한 아버지’


Q : 대외적으로 알려진 백범의 모습 이외에 가족만이 아는 백범의 모습이 있다면?
A : “교과서 속 백범은 웃는 모습이 온화한, 인자한 지도자로 비친다. 하지만 가족에게는 굉장히 냉철한 아버지였다고 들었다. 항상 가족보다 나라를 우선했기 때문이다. 백범의 장남, 저에게는 큰할아버지(김인)께서 독립운동 중 폐병으로 위독했을 때 페니실린 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했으나, 거절하셨다. 국고(독립자금)를 사적으로 쓸 수 없다는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가족에게 깊이 남아 있다. 결국 큰할아버지는 27세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선택이 얼마나 냉혹했는지는 가족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왜 그렇게 했는지는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Q : 개인 김용만과 김구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이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했나?
A : “돌아보면 비교적 순응적인 삶을 살아왔다. 진로 선택이나 군 복무에서도 가족의 기대를 많이 고려했다.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정치학을 전공하게 된 것도, 해병대에 입대하고 싶었지만 공군 참모총장이셨던 김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군 장교로 복무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어릴 때부터 집안 어르신들로부터 늘 ‘네가 잘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말의 무게감을 잘 알고 있다.”


Q : 정치인 김용만의 목표는 무엇인가?
A : “독립운동계와 보훈계의 정상화다. 그것이 정치에 발을 들인 이유이자 목표다. 당장의 정치적 욕심보다는 초심을 지키고, 실제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하고 싶다. 정치권에 들어와 보니 왜 그동안 바뀌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의지만 있으면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더 책임감을 느낀다. 반대로 생각하면, 제가 이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여기에 왔구나, 나의 쓰임이 이거구나 싶다. 그런 면에서 딱 이 주제에 맞춤형인 저를 알아봐 준 당의 선배들께 감사한 부분이 많다.”


Q : 지금 쓰고 있는 815호 의원실도 당의 선배에게 물려받은 곳이라고 들었다.
A : “맞다. 원래 박찬대 전 원내대표가 쓰던 방이다. 22대 국회 시작 때 초선인 저에게 내어주셨다. 당신도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보니 대한독립 기념일을 의미하는 815호를 3선 때까지 쓰셨던 거다. 그런데 제가 왔다는 걸 아시고는 “아 그러면 백범 후손인 후배에게 주겠다 ” 해서 저를 지정해서 물려주셨다. 정말 감사하게 받았고, 자랑스럽게 잘 쓰고 있다.”


Q : 백범이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적 상황을 본다면 어른으로서 가장 먼저 무엇을 꾸짖을까?
A : “극단적으로 분열된 정치 현실을 굉장히 경계했을 것이다. 국익을 기준으로 통합하고 협력하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던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독립운동가를 폄훼하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행태를 많이 꾸짖지 않으셨을까 한다.”


박세나 월간중앙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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