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를 솥에 붓고, 소줏고리를 위에 얹는다. 솥과 소줏고리는 밀가루 반죽으로 밀봉하고, 소줏고리엔 얼음을 부었다. 찬 기운에 응결된 증기가 그릇에 투명한 액체로 모인다. 소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지난 13일 막을 내린 넷플릭스 요리 서바이벌 예능 ‘흑백요리사 2’ 1화의 한 장면이다. 떨리는 손으로 음식보다 술을 먼저 만들어내던 이 사람, ‘술 빚는 윤주모’ 윤나라(39)씨다. 지난 22일 서울 용산구 해방촌 윤주당에서 그를 만났다. 윤주당은 그가 2019년부터 운영하다 ‘흑백요리사 2’ 출연 이후 잠시 쉬고 있는 식당이다. 윤씨는 “소주를 내리는, 요리하는 모습 한 장면만 나왔으면 하고 흑백요리사에 지원했다”고 밝혔다.
“한국에 전통주 문화와 그에 걸맞는 음식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 양조장에서 만든 술을 가져가면 주조하는 장면을 보여드리기 어렵지 않나. 주어진 시간 동안 술 내리는 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소주를 내리기로 했다. 주모가 가진 궁극의 스킬을 모았을 때 나오는 술이 소주이기도 하고.”
첫 라운드에선 소주에 수육과 호박찌개, 그리고 밥 한 공기를 더 해 ‘주모의 한 상’을 내놓았다. 심사위원 안성재 셰프는 “특별한 손맛”이 느껴진다며 고민 없이 ‘생존’ 판정을 내렸다.
Q : ‘주모의 한 상’은 어떻게 준비했나.
A : “소주를 먼저 생각하고 어울리는 음식을 떠올렸다. 찌개와 수육, 봄동 무침과 세 가지 양념장까지 한국식 반상을 준비했다. 내가 하는 건 ‘익숙하지만 전혀 모르고 있었던 요리’다. 우리가 알고 있었는데 모르게 된 맛이 있다. 원래 겨울에는 100일 숙성 발효한 약주를 먹고 봄엔 꽃술을 먹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나고 대량 생산 시스템에 익숙해져서 (현대인들은) 경험해 본 적 없는 맛이 된 거다. 그 맛을 다시 만들어내고 싶다. 그게 미식 아닐까.”
윤나라 인생의 변곡점도 그 ‘경험’에 있었다. 윤주모가 되기 전, 그는 서울예대 영화과를 졸업한 후 공연 기획 일을 하고 있었다. “2011년쯤, 한 공연을 기획했는데 자희향이라는 전통주와 페어링 할 기회가 있었다. 쌀·물·누룩으로만 빚은 전통주를 처음 만난 거다. ‘세상에, 이렇게만 빚었는데 과실향이 나고 너무 맛있네’ 이러면서 푹 빠졌다. 몇 년 뒤 그 술을 만든 분의 선생님을 찾아가서 배우기로 했다. 그때 서른 살이었다.”
박록담(본명 박덕훈) 사단법인 한국전통주연구소 소장을 만난 윤나라는 술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음식디미방』 『산가요록』등 고(古)조리서를 보며 직접 술을 만들었다. 그렇게 윤나라는 윤주모가 되어갔다. 해방촌에 주막 윤주당을 열고 손님들에게 “주모라고 부르라”고 했다.
Q : ‘술빚는 윤주모’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A : “문헌 속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직업여성이 주모 아닐까. 한 주막의 사장으로서 (이방인의) 환대도 담당하면서 음식도 하고, 재워주고, 술도 주고, 해장도 책임진다. 나 또한 21세기의 프로페셔널한 주모가 되고 싶다.”
곰팡이와 효모를 모두 가지고 있는 누룩은 그 종류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래서 계절을 이용하고 쌀과 물의 비율을 조정하면, 쌀·물·누룩만으로 만들 수 있는 술이 셀 수 없이 많아진다. 윤주모가 이제까지 개발한 술은 총 3종이다. 모두 2024년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문을 연 자신의 양조장에서 만들었다.
Q : 직접 개발한 술을 가지고 나왔다.
A : “촬영 때 가지고 온 ‘윤주당 탁주 12도’는 찹쌀·물·누룩으로 빚는 ‘찹쌀단양주’인 부의주 기법으로 만들었다. 물이 적고 과실 향이 풍부하게 나는 술이다. ‘남산의 밤’이라는 술은 두 번 빚는 ‘이양주’ 기법으로 만든 술이다. 술밑에 백설기가, 술덧엔 찹쌀 고두밥이 들어간다. 단호박도 넣었다. 과하게 달지 않아서 음식이랑 조합이 좋다. 그리고 ‘윤주당 탁주 17도’는 멥쌀로만 빚는 이양주, 당백화주 기법으로 빚었다. 셋 중 가장 독하고 드라이한 술이다.”
Q : 세미파이널에서 아쉽게 떨어졌다. 결승전 주제가 ‘나를 위한 요리’였는데, 올라갔다면 어떤 음식을 내놓았을 건가.
A : “맑은 술, 약주를 못 보여줬다. 약주를 가져가서 나를 위한 술상을 차렸을 거다. 청국장에 제육볶음, 쌀밥이랑 반찬까지 해서. 그리고서는 ‘저는 발효 인간입니다’라고 말했을 것 같다. 그거까지 보여드렸으면 완벽했을 텐데.(웃음)”
Q : 현재까지 출연한 여성 요리사 중에선 최고 성적을 거뒀다.
A : “영광이다. 훌륭한 셰프들이 많은데도, 나 자신이 한 단계씩 성장하며 그곳까지 갔다는 게 뿌듯하다.”
Q : 요리사 업계에선 여성의 비율이 낮다.
A : “출산하면 몸의 호르몬이나 정신력에 변화가 큰데, 요리는 신체적으로 힘이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인정받기 위해선 더욱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출산을 겪고도 경력을 이어가는) 여성 요리사들의 비율이 낮은 것 같다. 나 역시도 촬영 당시 출산 100일 좀 넘었을 때였다. 그럼에도 이금희 조리장님이나 선재스님 등 멋진 선배들이 나와주셔서 용기 내어 이어갈 수 있었다.”
Q : 전통주의 매력에 입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A : “가까운 양조장을 찾아보시면 좋다. 국내 여행을 떠날 때 양조장을 검색해서 가보시는 것도 추천한다. 우리나라에 정말 많은 양조장이 있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음식이 다양한 만큼 술도 다양하다. 거기서 술을 사다 지역에서만 나는 제철 음식과 먹어보시는 걸 추천한다. 애주가면 집에서 한번 술을 빚어보시는 것도 좋다.”
Q : 주모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A : “자가 누룩으로 술을 빚을 계획을 가지고 있다. 윤주당도 (흑백요리사) 열기가 잠잠해지면 다시 운영할 거다. 더 많은 분에게 (전통주와 한식을) 보여드리고, 소개하고, 좋아하게끔 하고 싶다. 나중에는 할머니 주모가 되는 게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