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갓 스무살이 된 청년이 시즌 첫 메이저 테니스대회인 호주오픈을 뒤흔들고 있다. 주인공은 2005년생 베트남계 미국 선수 러너 티엔(세계 29위)이다. 티엔은 지난 25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대회 남자 단식 16강전에서 다닐 메드베데프(러시아)를 3-0(6-4 6-0 6-3)으로 물리쳤다. 당초 세계 12위이자 2021년 US오픈 우승자인 메드베데프가 우세할 거란 관측이 많았지만, 티엔이 예상을 뒤엎었다. 티엔이 메이저 대회(호주오픈·파리오픈·윔블던·US오픈) 8강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로써 티엔은 2015년 닉 키리오스(당시 19세·호주) 이후 가장 어린 나이에 호주오픈 8강 무대에 서는 선수가 됐다. 미국 국적으로는 2001년 US오픈 앤디 로딕(당시 18세·은퇴) 이후 가장 어린 메이저 대회 8강 진출자로 기록됐다. 미국 테니스계도 들썩거린다. 교사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러너(Learner)라고 지었는데, 미국 팬들은 “테니스 배우는 속도가 어마어마한 러너(학생)인 동시에 상대를 그의 러너(학생)로 만들어 버린다”며 티엔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카를로스 알카라스(스페인)·야니크 신네르(노르웨이)와 견줄 만한 ‘신성’이 미국에도 나왔다”고 한껏 기대하고 있다. 알카라스와 신네르는 최근 2년간 4대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4개씩 나눠 가지며 테니스계를 양분한 남자 테니스 ‘빅2’다.
테니스는 미국·유럽 등 서양 선수들이 득세하는 대표적 ‘백인 스포츠’다. 아시아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는 건 드문 일이다. 2018년 호주오픈에서 수퍼스타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를 16강전에서 쓰러뜨리고 준결승까지 올라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스위스)와 4강전에서 맞붙었던 정현 정도가 최근 사례다. 아시아 테니스에 한줄기 희망이 된 티엔은 1970년대에 베트남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난민의 자녀다.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에서 나고 자란 베트남계 미국인 티엔은 미국과 아시아 테니스의 장점을 두루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신장도 1m80㎝다. 아시아 선수로는 작지 않은 체구다. 박용국 해설위원은 “아시아인 특유의 세밀한 감각을 지니고 태어난 그가 미국식 테니스를 배우면서 시너지를 냈다. 미국 특유의 ‘파워’를 바탕으로 아시아의 ‘정교한 플레이’를 구사하는 까다로운 선수다. 한국과 아시아 테니스도 할 수 있단 희망을 줬다”고 분석했다. 티엔은 지난해 11월 모젤오픈에서 생애 첫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우승을 차지한 데 이어 12월에는 ATP 넥스트 젠 파이널스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티엔의 스승은 대만계 미국인인 마이클 창(1m75㎝) 코치다. 아시아계 선수로는 최초로 메이저(1989년 프랑스오픈) 우승을 이뤘다. 창의 강점은 끈질기게 버티고 버텨 상대를 이기는 강한 정신력이었는데, 티엔은 스승의 멘털을 빼닮았다. 이날 티엔은 경기 도중 갑작스럽게 코에서 출혈이 났다. 보통 선수라면 당황해 흐름을 상대에 넘겨줬을 법하다. 하지만 티엔은 침착하게 메디컬 타임아웃을 요청하고 7분간 느긋하게 휴식했다. 출혈이 멈추자, 천천히 코트에 돌아와 승기를 잡았다. 박 위원은 “티엔은 멘털 뿐만 아니라 풋워크, 안정감 등이 돋보인다. 마치 창 코치의 전성기를 보는 듯하다”면서 “선진국형 교육과 좋은 지도자 영입이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 테니스에도 더 많은 기회를 열어주면 제2의 정현으로 성장할 선수가 많다”고 말했다. 티엔의 8강 상대는 지난 대회 준우승자이자 세계 3위인 알렉산더 츠베레프(독일)다. 그는 “힘든 경기가 될 것”이라면서 “도전하겠다. 기대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