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늦은 나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정치 상황 속 고국을 등지고 1950년대 초 파리에서 공부했다. 발은 낯선 곳에 딛고 눈은 하늘을, 우주를 향했다. 그리고 만년에 피어났다. 경남 진주 출신 이성자(1918~2009)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태어난 에텔 아드난(1925~2021)도 그랬다.
서울 도산대로 화이트 큐브에서 열리고 있는 ‘태양을 만나다: 에텔 아드난과 이성자’는 에텔 아드난의 국내 첫 전시이자 이성자와의 첫 만남이다. 산을 연상시키는 형태에 연노랑 배경의 밝은 추상화는 에텔 아드난의 ‘무제’(2014), 나란히 걸린 이성자의 ‘흰 거울’(1960)은 겨자색 물감을 찍어 잔 붓질로 쌓아 올리듯 그린 색면추상이다. 아드난이 직조 장인들과 협업해 만든 진녹색 태피스트리 ‘여름 공원’(2021)도 이성자의 붉은 판화 ‘풀잎에 맹세하다’(1962)와 자연스럽게 만났다. 태어난 곳도, 겪은 일도 달랐던 두 화가의 세계가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었을까?
이성자는 이혼녀였다. 남편의 외도로 어린 세 아들을 두고 파리로 건너갔다. 1951년의 일이다. 2년 만에 패션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 자립할 요량이었지만, 그대로 눌러앉아 그림을 배웠다. 35세 때 일이다. 아카데미 그랑 쇼미에르 화실에 매일 나가던 그 시절을 “화실엔 누드모델이 있어 난방이 잘 됐기 때문”이라고 돌아봤다. 아이들이 보고 싶은 마음은 “내가 좋은 붓질을 하면 애들이 건강하리라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한 번 붓질하면 아이들이 밥 한 숟가락을 더 먹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다잡았다. 화문석 짜듯 잔 붓질로 쌓아 올린 추상화에 ‘5월 단오 No.1’‘달콤한 나의 도시’ 같은 문학적인 제목을 붙였다. 이번 전시엔 이성자의 1960년대 작품이 중심이지만 이후 이성자는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는 비행기 창밖으로 본 극지 풍경, 우주 모티브로 나아갔다.
에텔 아드난은 망명객이었다. 1949년 파리 소르본 대학에 철학을 공부하러 갔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UC버클리와 하버드대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1958~72년 캘리포니아 도미니칸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시를 쓰던 그는 이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72년 베이루트에 돌아가 일간지 편집자로 일하며 레바논 내전을 다룬 소설을 썼다. 이 때문에 살해 위협에 시달리던 끝에 고국을 떠났다. 프랑스어와 영어로 쓴 글에는 격동의 레바논 역사를 망명자의 시선으로 담았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말이 아니라 선과 색이면 충분하다”며 미 서부의 빛과 자연을 밝은 색감으로 살렸다. 해와 달을 연상시키는 원형, 간결한 색띠로 표현한 지평선, 샌프란시스코 북쪽 타말파이스 산이 화폭에 담겼다. 그의 그림은 2012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에 출품하면서 주목받았다. 87세 때 일이다. 이후 미국 휘트니 비엔날레, 구겐하임 미술관 등에서 전시했다.
전시 제목 ‘태양을 만나다’는 아드난이 1968년 발표한 시에서 따왔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의 죽음을 기리는 애가(哀歌)였다. 고향에 발붙이지 못한 두 화가는 같은 시기 파리의 문화적 유산을 흡수했고, 1960년대 우주 탐사 열기를 경험했다. 함께한 적은 없지만 태양·별 모티브를 그리고 빛을 향하며 격동의 시대를 견뎠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저마다 겪고 있는 문제도, 다른 곳의 누군가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돌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드난의 시 ‘최초 우주비행사를 위한 장례 행렬’ 중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 여행은 끝났고 또 다른 여행이 이제 막 동텄다.”
전시를 기획한 수잔 메이 화이트 큐브 글로벌 아트 디렉터는 “화이트 큐브 서울의 양진희 디렉터를 통해 이성자를 알게 됐다”며 “다른 듯 비슷한 시대를 겪은 두 화가의 예술 세계가 평행선처럼 어우러졌다”고 말했다. “전 세계적으로 우울한 소식이 많지만, 한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겐 낙관이 필요하다”며 “어두운 시대를 견뎌낸 두 여성의 밝은 그림을 만나보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3월 7일까지,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