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한국 입법부가 역사적인 무역 합의를 입법화하지 않았다”며 “한국에 대한 자동차, 목재, 의약품 및 기타 모든 상호관세를 15%에서 25%로 인상한다”고 밝혔다.
관세 인하를 조건으로 합의한 3500억 달러(약 506조원)의 대미 투자를 위한 ‘대미투자특별법’이 한국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점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대규모 대미투자를 약속한 유럽연합(EU)·일본·대만 가운데 한국만 콕 집어 압박하자, 정부는 캐나다를 방문 중인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미국으로 급파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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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 없던 발표…“골대 옮겨버린 것”
정부 소식통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한국에 대한 관세를 25%로 올리겠다고 밝힌 직후 “사전에 아무 협의도 없는 상태에서 발표가 나왔다”며 “이번 조치는 한마디로 경기 중에 갑자기 골대를 옮겨버린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가 지난해 11월 체결한 ‘전략적 투자에 관한 양해각서(MOU)’에는 관세 인하 조건으로 ‘MOU 이행을 위한 법안 제출’ 규정이 명시돼 있다. 관련법을 발의하면 그달 1일자로 15%의 관세를 소급 적용하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11월 26일 특별법을 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아직 재정경제기획위원회에 계류돼 있지만, 미국은 합의 조건이 이행됨에 따라 지난달 4일 관보를 통해 11월 1일자로 관세를 15%로 소급 인하하는 조치를 공식화했다.
미국이 법안 발의만으로 관세를 인하했다는 것은, ‘법안 통과 지연’ 문제가 관세 합의 조건과 관련이 없음을 스스로 시인하고 있다는 의미다. 정부 소식통은 “양국이 행정부가 당초 입법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을 공유하고 법안 ‘통과’가 아니라 ‘발의’를 조건으로 했던 것”이라며 “이날 조치는 일방적 조건 변경에 해당하는 당황스러운 내용”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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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회 표결 연기…‘만만한’ 한국 압박?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대한 관세 ‘원복’ 조치를 발표한 이날은 당초 EU의 입법기관인 유럽의회가 관세 인하의 조건으로 약속한 대미 투자액 6000억 달러(약 868조원)와 관련한 법안을 처리하기로 했던 날이다. 그러나 EU는 트럼프 행정부가 그린란드 병합 야욕을 드러내며 그에 반발한 유럽 8개국에 대한 10% 추가 관세 부과 방침을 밝히자 의결 일정을 연기했다.
EU가 더 나아가 930억 유로(약 160조원) 규모의 대미 보복관세와 미국의 무역을 제한하는 통상위협대응조치(ACI) 발동 카드까지 꺼내려 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추가 관세 부과 방침을 철회했다.
외교 소식통은 “한국과 EU는 미국과의 무역 합의 과정에서 의회에 법안을 발의하면 관세를 인하하는 유사한 내용의 합의를 맺었다”며 “한·EU 모두 관련법의 의회 표결이 이뤄지지 않은 동일한 상황에서 한국에만 억지 주장을 한 배경은, 상대적으로 독자적 대항력이 떨어지는 한국을 압박해 유럽을 압박하기 위한 의도일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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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내는 일본…선거 전 ‘성적표’ 독촉?
의회의 입법 과정이 필요한 한국 및 유럽과 달리 5500억 달러(약 796조원)의 대미 투자를 약속한 일본은 지난해 12월부터 이미 대미 투자처 선정을 위한 대미투자 협의위원회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일본의 특성을 고려해 무역 합의에서 관련 법안 발의 등의 조건이 채택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즉각적인 투자 논의가 진행되는 합의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이달 들어 이민단속 요원들의 총격으로 미국인 2명이 사망하면서 지지율이 급락하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부정적 여론을 돌파하기 위해선 가시적인 경제 성과를 제시해야 하는데, 한국의 조속한 대미투자 ‘성적표’가 필요하다는 해석이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일 취임 1주년 회견에서 “한국, 일본과 (무역) 합의를 타결하면서 전례 없는 수준의 자금을 확보했다”며 한국의 대미 투자금을 핵심 성과로 제시했다. 한국 정부의 입장과는 무관하게 해당 투자금이 알래스카 천연가스 사업에 투입될 가능성을 시사하며 한국에 구체적 성과물을 요구하는 듯한 메시지를 내기도 했다.
‘쿠팡’ 때문?…‘친중’ 캐나다 방문 보복?
관세 압박의 배경에 대규모 고객 정보 유출에 대한 정부의 조사를 “미국 기업에 대한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쿠팡과 관련이 있을 거란 관측도 있다. 실제 JD밴스 부통령은 지난 23일 방미한 김민석 총리와의 회담에서 쿠팡 관련 문제를 먼저 거론했다. 그러나 정부 관계자들은 “미국에서는 존재감이 거의 없는 쿠팡 때문에 이런 결정이 나왔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산 자동차 관세를 꺼낸 시점이 한국 대표단의 캐나다 방문 기간과 겹쳤다는 데 주목하는 시선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5일 중국과 가까워지는 캐나다를 향해 “중국과의 무역 합의는 재앙이 될 것”이라며 “중국과 협정을 체결하면 100% 관세를 물릴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중국과의 자동차 협력을 문제 삼았다.
공교롭게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압박이 나온 이날 한국 정부 관계자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 등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이 포함된 한국대표단이 캐나다에서 한·캐 자동차산업 협력 포럼과 CEO 대화를 진행했다. 다만 이번 방문은 캐나다 잠수함 수주를 위한 일정이라, 자동차 관련 관세 발언과 직접 연결하기는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 소식통은 “일단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대한 관세를 올리겠다는 언급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별도 행정명령이나 관보 게재 등의 절차가 필요하다”며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내놓은 유럽과 캐나다, 이란 등에 대한 관세가 모두 실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날 발표도 정치적 메시지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