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루지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출격이 불투명했다. 2014년 소치와 2018년 평창, 2022년 베이징에선 4개 종목(남녀 1인승, 남자 2인승, 팀 릴레이) 모두 나섰지만, 최근 진행 중인 세대교체가 더뎌지면서 올림픽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13일 희소식이 날아왔다. 여자 1인승 정혜선(31·강원도청)이 극적으로 올림픽 쿼터를 확보했다는 낭보였다.
지난 26일 전화로 만난 정혜선은 “지금 독일 뮌헨에서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로 막 넘어가던 참이다. 인스브루크가 코르티나담페초와 가까워 이곳에서 회복 훈련을 마치고 대회장으로 이동할 계획”이라며 “여전히 올림픽 출전이 실감 나지 않는다. 무려 12년을 기다린 올림픽이다. 어렵게 나서게 된 만큼 후회 없이 내 실력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마침내 올림피언의 꿈을 이룬 정혜선. 그런데 시작은 겨울 스포츠가 아닌 역도였다. 운동을 좋아하던 중학생 시절. 역도선수였던 사촌 언니의 권유로 입문했다.
그러나 실력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3년간 역도를 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면서 앞날을 고민하던 도중 두 번째 권유가 정혜선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루지였다. 정혜선은 “2014 소치 동계올림픽을 앞둔 시점으로 기억한다. 당시 평창 대회 유치는 확정이 된 상태였는데 평창에서 역도부 코치로 일하던 선배가 우연히 알게 된 루지를 내게 소개했다”고 했다. 이어 “국내에는 루지를 제대로 탈 줄 아는 여자 선수가 거의 없었다. 선배 말로는 국가대표 선발전만 잘 통과하면 바로 태극마크를 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선발전을 준비했다”고 덧붙였다.
선발전은 사실상 체력 검증 테스트였다. 힘과 스피드 같은 기본기를 판단해 앞으로 루지를 잘 탈 수 있는 유망주를 뽑았다. 역도선수 출신의 정혜선은 어렵지 않게 관문을 통과했고, 그렇게 루지의 트랙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국가대표가 곧 올림피언을 뜻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길목마다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부상이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대비한 여름철 슬라이딩 훈련에서 넘어져 팔과 쇄골이 부러졌다. 결국 출전 불발.
이어 4년을 기다린 베이징 대회를 앞두고도 부상이 찾아왔다. 올림픽 쿼터 대회 기간 공식훈련을 하다가 썰매 전복 사고가 나 기권했다. 결국 올림픽 쿼터 포인트 부족으로 베이징행마저 좌절됐다. 이번 올림픽이 누구보다 감격스럽게 다가온 이유다. 정혜선은 “출전 확정 소식을 듣고도 어리둥절했다. 국제루지연맹(FIL) 공지를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함께 역도를 했던 친구는 ‘다 늙어서 올림픽 가냐’며 핀잔 같은 칭찬을 건넸다”고 웃었다.
루지는 썰매 위에 등을 대고 누워서 탑승하는 대표 썰매 종목이다. 몸을 최대한 낮춰 공기 저항을 줄인 뒤 종아리와 허벅지 힘으로 썰매 날(러너)에 압력을 가하고, 어깨와 상체의 미세한 기울기를 통해 방향을 조절한다. 루지의 최대 매력은 스피드다. 썰매 종목 가운데 가장 빨라 남자 선수들은 시속 130~150㎞까지 속도를 낸다. 여자 경기에서도 120㎞ 안팎까지 스피드가 나온다.
지난해 받은 어깨 수술도 딛고 일어선 정혜선은 “평소 경험할 수 없는 속도를 썰매에서 느낄 수 있다. 마치 안전바 없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다. 심지어 그 안에서 방향 조종까지 해야 하니 매력이 넘친다”면서 “개인 국제대회 최고 성적은 17위다. 이번 대회에선 꼭 10위 안에는 들고 싶다. 메달은 힘들겠지만, 루지라는 종목을 많은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도 후회 없는 성적을 내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