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눈 없는 나라서 온 스키 소녀

중앙일보

2026.01.27 07:01 2026.01.27 12:23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탈룰라 프룰은 동계올림픽에 출전하는 첫 필리핀 여자 선수다. 연 평균 기온 27도의 열대 지역 출신인 그는 3살 때 가족 휴가로 찾은 미국에서 알파인 스키에 입문했다. [사진 프룰]
“고국 필리핀을 대표해 나서게 되다니 벌써 설레네요. 눈 없는 나라의 희망이 되고 싶습니다.”

17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진 필리핀은 눈이 오지 않는 나라다. 동남아시아 특유의 고온다습한 열대지역 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섭씨 27도나 된다. 온종일 비가 내리는 우기만 있을 뿐, 1년 중 어느 날에도 눈은 볼 수 없다. 이런 척박한 환경 탓에 필리핀은 동계올림픽 무대에서 ‘당연히’ 변방으로 분류되어 왔다.

자국 최초의 동계 올림피언은 1972년 삿포로 대회에서 알파인스키 대표로 나선 후안 시프리아노와 벤 나나스카. 이후 간간이 설상과 빙상에서 선수들이 출전하기는 했지만, 세계 무대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이는 없었다. 특히 여자 선수의 벽은 더 높았다. 삿포로 대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필리핀은 총 6차례 동계올림픽에 선수를 파견했지만, 필리핀 국기를 달고 출전한 여성 올림피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선 필리핀 체육사를 새로 쓸 샛별이 뜻깊은 데뷔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2008년생 ‘스키 소녀’ 탈룰라 프룰이다. 대회 조직위원회는 지난 25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프룰이 필리핀 여성 최초로 동계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했다. 자국 역대 최연소 동계올림픽 출전이라는 역사적인 기록도 세우게 됐다”고 비중 있게 보도했다.

필리핀 여성 최초의 동계올림픽 출전을 앞둔 18세 소녀 탈룰라 프룰. 알파인스키 종목에서 뜻깊은 발걸음을 내디딘다. [사진 프룰]
프룰이 이 역사적인 티켓을 거머쥐기까지 과정은 그야말로 ‘7전 8기’였다. 미국 유타주를 베이스로 훈련하는 그녀는 마지막 예선 전날까지 커트라인에서 단 몇 점 차로 밀려나 있었다. 주변의 회의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프룰은 마지막 기회였던 예선 최종일 경기에서 기적적으로 점수를 따내 올림픽행 열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온 우주가 내게 운명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고 가슴 벅찬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필리핀·미국 이중국적자인 프룰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혈통이 섞인 소수 민족 운동선수로서 남모를 고민과 고군분투를 거쳐왔다. 스키와의 만남은 3살 때 가족휴가를 보내던 타호에서 시작됐다. 눈의 매력에 빠진 프룰은 7살 때부터 본격적인 교육을 받았고, 2024년부터 국제스키연맹(FIS) 공식 대회에 출전했다. 지난해 하얼빈 동계아시안게임에선 14위를 기록하며 예열을 마쳤고, 꾸준히 쿼터 대회를 소화하며 이탈리아행 티켓을 따냈다.

물론 프룰이 이번 대회에서 당장 메달을 따내리라고 전망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프룰은 “출전 확정 소식을 듣고 정말 기뻤다. 다른 필리핀의 젊은 여성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됐으면 한다”며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고봉준([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