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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도너번의 마켓 나우] 체감 물가와 분노의 정치학

중앙일보

2026.01.27 07:12 2026.01.27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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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도너번 UBS 글로벌 웰스 매니지먼트 수석 이코노미스트
미국에서 ‘생활비 부담 위기’가 정책의 중심 변수로 부상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가구의 4분의 3이 소득이 물가 상승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느끼며, 정부의 물가 대응이 불충분하다고 평가한다.

이런 압박 속에서 정부는 시장 개입을 강화하고 있다. 연방준비제도를 거치지 않고 행정부 차원에서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낮추는 새로운 형태의 양적완화(QE)를 실험하고, 신용카드 금리 상한 도입과 식료품 가격 안정을 위한 관세 조정도 논의 중이다.

생활비 부담 위기는 단일 원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물가 수준’이 아니라 ‘물가에 대한 체감’의 문제다. 통계와 체감은 대개 어긋난다. 소비자들은 자주 구매하거나 가격을 자주 확인하는 품목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식료품·휘발유·전기요금이 생활비 부담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이유다.

일부 품목의 급격한 가격 상승은 사회적 기억으로 남는다. 지난해 60% 급등한 달걀, 최근 18% 가까이 오른 스테이크 가격은 미국 소비자들 사이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된다. 평균 물가가 안정돼도 이런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체감은 소득 인식과도 맞물린다. 실질소득이 늘고 있더라도 소비자가 느끼는 물가는 더 빠르게 오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많은 이들은 임금 인상을 ‘더 열심히 일한 대가’로 받아들인다. 실제로는 물가 상승을 보전하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결과 ‘예전과 같은 생활을 유지하려면 더 많이 일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지고, 불만과 분노가 누적된다.

비교는 체감을 증폭시킨다. 소셜미디어는 ‘이 정도 생활은 당연히 가능해야 한다’는 기대와 ‘저 정도는 나도 누리고 싶다’는 욕망을 동시에 자극한다. 인플루언서들은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소비를 자연스럽게 해내는 존재로 인식된다. 일상적인 옷조차 부담스러운 이들에게, 타인의 명품 소비는 불공정하게 느껴질 수 있다.

세대 간 비교도 빠질 수 없다. 주택이 대표적이다. 젊은 세대는 부모 세대가 같은 나이에 집을 살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자신들은 그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느낀다. 자산 축적의 출발선이 다르다는 인식은 생활비 부담을 구조적 좌절로 바꾼다.

이 위기의 복잡성은 정책적으로 중요하다. 실제 물가 상승률을 낮추는 것만으로는 체감을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 생활이 나아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한, 사람들은 책임자를 찾고 분노는 정치로 향한다.

결국 생활비 부담 위기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다. 그리고 그 체감이 오늘날 정책과 정치의 방향을 결정한다.

폴 도너번 UBS 글로벌 웰스 매니지먼트 수석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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