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근무하는 병원의 전자의무기록 프로그램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스위스 치즈 모양의 ‘사건보고’ 아이콘이 있다. 예기치 않은 실수나 사고, 즉 환자안전사건이 발생하면 환자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경우부터 심각한 사고까지 모두 이것을 이용해 왜 사건이 생겼는지, 이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보고한다. 실수를 저지르기 어려운 시스템, 사람이 실수를 하더라도 걸러질 수 있는, 스위스 치즈 구멍이 없는 시스템을 만들려는 것이다.
과도한 소송, 환자 안전 악화시켜
독립기구가 먼저 원인 규명하고
산재처럼 과실 무관 보상해야
‘명의’ 한 사람의 능력에 기대어 질병을 치료했던 과거와는 달리 현 의료 시스템은 여러 사람과 복잡한 절차를 거치며 다양한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사용한다. 덕분에 치료 성적은 월등하게 좋아졌지만 실수가 발생할 가능성도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환자안전사건으로 인해 매년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사망과 맞먹는 300여만 명이 사망하고, 전 세계 생산량의 약 10%가 감소하며 의료비용은 10% 이상 증가한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2021년 환자안전사건 사망자 수가 3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어 산업재해 사망자 수나 교통사고 사망자 수(연간 2000여 명)의 10배 이상에 달한다.
20여 년간 한 분야의 진료에만 집중해 온 필자도 여전히 놓치거나 실수할 때가 있다. 당연히 사건을 보고해야 하지만, 때로는 ‘의료사고 17억 배상’ ‘의료진은 기소’ 등의 기사가 떠올라 머뭇거리게 된다. 그러나 보고하지 않으면 내 실수가 환자의 위해(危害)로 이어지는 것을 미리 막지 못한, 시스템의 구멍은 그대로 남는다. 누군가 다시 비슷한 실수를 하면 또 다른 환자가 위험해지는 것이다.
의료진의 사과가 ‘자백’이 되면 곤란 환자안전사건을 줄이려면 의료진이 안심하고 사건을 보고할 수 있어야 한다.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환자안전을 전담하는 공공기관에서 사건을 조사하면서 WHO의 권고대로 조사로 알아낸 정보를 법적 증거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지대의 원칙’을 적용한다. 아울러 사람들이 실수를 인정하도록 격려하면서도 고의로 위험한 행동을 할 때는 여전히 책임을 묻는 ‘공정문화’의 원칙을 따른다. “누가 잘못했나”를 따지기보다 “어떻게 시스템을 개선할까”를 고민할 때 안전사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의료 분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기 위해 바로 형사고소·고발을 하는 대신 독립적인 ‘환자안전 조사기구’를 만들어 여기서 안전지대, 공정문화의 원칙 하에 전문가들이 제대로 조사하도록 하자. 사고가 난 분야에 경험이 많은 전문가가 들여다볼 때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지, 어떻게 하면 같은 사건이 다시 생기지 않겠는지 더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안전 조사기구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안타까운 결과가 환자안전사건 때문에 생긴 일인지, 아니면 질병의 자연 경과나 치료의 당연한 합병증인지를 구별하는 것이다. 환자의 건강 상태가 위중할수록, 해야 하는 치료가 어려울수록 그 결과가 나쁠 위험이 크고, 아무런 실수가 없어도 환자를 잃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연 700~800건의 형사 고소·고발 중 의료진이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는 40~50건이고, 연 800~900건의 민사 소송에서 책임이 인정되는 경우는 약 30% 정도다. 객관적인 환자안전 조사기구가 명백히 환자안전사건 여부를 가린다면 환자와 가족이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몇 년씩 고통 속에서 지내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료진의 잘못이 없는데도 왜 의료 분쟁이 생겼을까. 아마도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의료의 결과가 항상 만족스럽기는 어려운데, 지금의 시스템에서는 안타까운 상황에 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자원이 부족한 데다가 ‘사과는 곧 자백’이라는 통념 탓에 제대로 소통하거나 위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호주·영국 등에서는 사과의 내용이 잘못을 인정하는 근거로 사용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만들어 두었다. 이제는 우리 사회도 예기치 못한 나쁜 결과에 대해 우선 진심으로 위로하고 사과하며 소통하고, 환자·보호자와 의료진이 한 팀이 되어 가슴 아픈 사건을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않았을까. 소통과 사과가 잘못을 인정하는 증거가 되지 않도록 보장한다면 많은 사람의 고통이 덜어질 것이다.
보상 위한 환자안전망기금 만들어야 우리는 필요할 때 경제적인 걱정 없이 치료받기 위해 전 국민이 국민건강보험료를 납부하지만, 환자안전사건으로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건강보험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 ‘누구 책임인가’를 먼저 묻기 때문이다. 산업재해를 공적 재원으로 보상하는 것처럼, 환자안전사건의 피해도 누구 잘못인지를 따지기 전에 ‘환자안전망기금’으로 빠르게 보상하자. 재원은 건강보험료 일부와, 의료 정책을 책임지는 정부의 재정으로 구성할 수 있다. 의료진이 중증, 난치, 응급질환 환자를 진료할 때에도 혹시나 있을 수 있는 나쁜 결과에 대한 배상 책임, 형사 책임을 각오하지 않고도 진료할 수 있도록 하자.
“누가 잘못했나”라는 비난 대신 “어떻게 하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를 함께 고민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환자 안전망은 단단해질 수 있다. 전자의무기록 화면 속 스위스 치즈가 더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더 나은 내일을 향한 노력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 바란다.
◆강희경=서울대 의대 소아과학교실 교수. 의·정 갈등 시기에 서울대 의대-서울대교수 비상대책위 3기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동료의 복귀를 막은 전공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현재 ‘더 나은 의료시스템을 함께 만들어 나가는 소비자-공급자 공동행동’의 공동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