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 점포 확산 흐름 속에 그간 금지돼 있던 주류 자동판매기 운영을 허용하는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다. 정부는 성인인증 강화, 운영시간 제한 등을 전제로 제한적 허용한다는 입장이지만 음주 폐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27일 정부ㆍ주류업계 등에 따르면 정부는 주류 자판기를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현행 법령상 일반 소매점(무인점포 포함)에서 주류를 자판기로 판매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그러나 산업통상부는 규제샌드박스를 통해 지난해 9월까지 주류 자판기 실증 특례를 진행했고, 이를 바탕으로 규제개혁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성인인증이 가능한 주류자판기의 제한적 운영을 허용하라고 권고했다. 인증기술 고도화와 운영 시간제한 등 관리ㆍ감독 강화가 조건으로 제시됐다. 국세청은 올해 상반기 중 관련 고시 개정을 예고했다. 주류업계는 최근 줄어드는 주류 소비가 늘어날 계기로 보고 반긴다.
그러나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주류 자판기를 도입해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국립암센터 최윤정 교수(가정의학과)는 “우리나라에선 24시간 전국 어디서나 술을 쉽게 살 수 있다”라며 “미국 등 해외 선진국과 비교하면 주류 접근성이 매우 높은 나라”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이런 상황에서 자판기로 문턱을 더 낮춰주면 어린이ㆍ청소년 음주를 부추길 것”이라며 “다른 나라는 음주 접근성을 제한하려는 정책을 펴는데 완전히 거꾸로 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광기 인제대 보건대학원 명예교수는 “주류 자판기 도입으로 술 소비가 늘어서 생기는 경제적 효과와 음주 폐해로 쓰는 건강보험 재정을 비교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훨씬 많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주류자판기 허용 논의는 신분증 스캔, 모바일 인증 등 성인인증 기술을 전제로 진행돼왔지만 전문가들은 청소년 접근을 완전히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광기 교수는 “과거 비슷한 인증 장치를 적용한 담배 자판기 역시 다 뚫렸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자판기는 판매 수단인 동시에 상시 노출되는 광고판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반적인 술 소비는 줄었다지만, 국내 음주 폐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음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은 연간 14조6000억원(2023년 건강보험연구원)에 달하며, 2024년 알코올 관련 사망자는 4823명으로, 매일 13명이 음주로 인해 사망했다. 음주 시작 연령은 2024년 기준 12.8세까지 낮아졌고, 2030 여성의 음주율(50.1%)과 고위험 음주율(9.9%)도 증가세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암연구소(IARC)는 술을 1군 발암물질로 규정했으며, “안전한 음주는 없다”고 선언했다. 단 한 잔의 술도 암을 유발하고 건강을 해친다는 의미다. 음주 폐해를 줄이기 위해 주류 접근성을 제한하라고 각국 정부에 권고했다.
해외 주요국은 주류 유통의 편의성보다는 국민 건강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의 중심축을 옮기고 있다. 대부분 주류 자판기를 금지한다. 일부 국가에서 허용하더라도 엄격한 연령확인 방식을 적용하고, 설치 장소ㆍ운영시간을 제한한다. 주류자판기를 허용하는 국가도 규제를 강화하거나 운영을 축소하는 추세다. 일본은 1950~60년대 주류자판기를 허용해 널리 보급됐다. 그러나 1996년 17만대를 넘어섰던 자판기는 2024년 9000여 대로 확 줄었다. 연령확인 강화, 심야 판매 제한, 공공장소 설치 제한 등의 조처를 하면서다. 최근 후생노동성은 주류자판기가 미성년자 음주 예방 교육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며 폐지를 권고했다.
최윤정 교수는 “주류자판기 설치에 따른 영향부터 평가해야 한다”라며 “음주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 치료 등에 들어가는 건보 재정 등을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