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나엘이 검은 부채를 펼치고, 미술관 밖에서는 사다리 로봇 GF2가 오체투지 하듯 온몸을 굽히며 천천히 수행정진했다. GF3가 팔을 흔들며 춤사위를 보여주고, 로봇 아해 11대가 철판 위에서 탭댄스를 췄다.
28일 오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 미디어 아티스트 권병준(55)의 로봇이 한껏 분위기를 띄운 뒤 커다란 브라운관 TV 모형 무대막이 오르자 주인공인 K-456이 등장했다. 웅변하듯 양팔을 흔들며 때론 은박접시 모자를 들어올리는 이 로봇은 입에 달린 스피커로 존 F. 케네디의 1961년 미 대통령 취임연설 속 구절을 반복했다. "미 동포 여러분,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으십시오." 사람 키 만한 로봇을 권병준과 두 명의 기술자가 번쩍 들어 미술관 입구로 옮겼다. 뒤뚱거리며 뒤로는 커피콩을 싸는 K-456이 장난감 트럼펫 연주에 맞춰 행진하듯 세상 밖으로 나섰다. 복원된 K-456의 첫걸음이다.
백남준(1932~2006)은 1964년 이족보행 원격조종 로봇 ‘K-456’을 만들었다. 동갑내기 TV 엔지니어 아베 슈야(94)와 함께 만든 이 로봇에 백남준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8번의 쾨헬 번호를 딴 이름을 붙였다. K-456은 20년 가까이 백남준의 전시 오프닝에 동행하며 사람들을 웃겼다. ‘기술의 인간화’를 꿈꾼 백남준은 어딘가 어수룩한 자신의 ‘반려봇’에 대해 짐짓 이렇게 농담했다.
" 흔히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줄이기 위해 창조되었다고들 하지만, 내 로봇은 인간의 노동을 늘린다. 왜냐하면 보시다시피 이 로봇을 10분 동안 움직이려면 기술자 다섯 명은 필요하니까. "
‘첨단’과는 거리가 먼 손 많이 가는 로봇이었다. 살아있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교통사고로 생을 마쳤다. 백남준의 회고전이 열리던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 앞 거리에서 차에 치였다. 의도된 퍼포먼스였다. 백남준은 이를 ‘21세기 최초의 참사’라 불렀다.
K-456의 원본은 독일의 미술관에 소장됐고, 백남준 아트센터는 1996년의 재조립 본을 구입했다. 아베 슈야가 회로도와 매뉴얼을 기증했다. 아트센터는 44년 전 백남준이 ‘사망선고’한 뒤 전시만 되던 이 로봇을 원래의 목적대로 걷고 말하게 하기로 했다. 미디어아트 스튜디오 ‘사일로랩’이 납땜한 회로를 되살렸고, 권병준이 로봇공연 ‘유령극단×로봇 K-456: 다시 켜진 회로’ 무대에 K-456를 함께 세웠다. 인간과 함께 퍼포먼스를 하려 고안된 K-456이 다른 로봇 14대와 한 무대에 오르는 건 62년 전 이 로봇을 만든 백남준도 생각지 못했을 거다.
27일 리허설 현장에서 미리 만난 권병준은 “K-456의 첫걸음이자, 새로운 친구들과의 만남”이라고 말했다. 밴드 ‘삐삐롱스타킹’ ‘원더버드’의 보컬 ‘고구마’로 활동하던 그는 네덜란드에서 전자음악과 미디어아트를 공부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24’를 수상했다. 백남준과 권병준의 로봇은 생산공장에 투입 예정인 현대차의 이족보행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 같은 일하는 로봇과 다르다. 스스로를 ‘백남준 키드’라 소개하는 권병준은 “인간의 행위를 학습해 익숙한 일을 사람처럼 잘하는 로봇은 기술자들의 몫”이라며 “내 로봇들은 일하지 않는다. 연약하고 궁상맞으면서도 거친 이들의 움직임에서 사람들은 흔들림을 보고 약한 인간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44년 전 백남준이 예견했던 대로 로봇이 맘대로 거리를 활보하다 교통사고까지 당하는 시대는 오지 않았지만, 로봇과 AI에 감정 이입하는 세대가 탄생했다.
백남준은 1932년 일제강점기의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국 최초의 재벌인 태창그룹 총수이자 친일파 백낙승의 3남 2녀 중 막내였다. 도쿄대 미학과 졸업 후 작곡을 공부하러 독일로 유학, 퍼포먼스로 이름을 날렸다.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TV 13대를 쌓아놓고 연 첫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이 최초의 비디오 아트 전시다. 이듬해 만든 로봇 K-456은 백남준의 시작을 함께 했다. 1970년대 초고속 네트워크 사회에선 모두가 비디오 아티스트가 되고 모든 예술가가 채널이 될 거라고 예견했다. 2019년 그의 회고전을 연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서는 이를 오늘날의 인터넷ㆍ스마트폰ㆍ유튜브와 연관 지어 평가했다. 백남준은 2006년 1월 29일 마이애미에서 눈을 감았다.
시대를 앞서갔고, 서둘러 떠난 그의 20주기인 29일, 백남준의 유해가 있는 서울 삼성동 봉은사에서는 오전 11시 추모제가 열린다. 오후 2시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김은준이 전자음악 ‘시퀀셜’을 연주하고, 권병준의 로봇 퍼포먼스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