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 유명 성장클리닉. 평일 오후에도 번호표를 손에 든 부모와 아이들로 대기실이 가득찼다. 진료를 마친 아이들과 함께 클리닉 밖으로 나오는 학부모들은 저마다 손에 성장호르몬 주사제가 담긴 보냉가방을 들고 있었다. 지난 9일 초등학생 남매를 데리고 이곳을 찾은 학부모는 “아이들 키 때문에 걱정이 많아서 멀리서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고 했다.
서울 강남구를 중심으로 키 성장 치료제를 처방하는 성장클리닉이 성업 중이다. 일부 학부모 사이에선 ‘성장 검사는 필수 코스’라는 이야기가 돌고, 키가 그리 작지 않은 아이에게도 클리닉을 권하는 분위기도 형성되고 있다고 한다.
28일 한 유명 성장클리닉에 문의하니, 자녀 성장 검사를 받으려면 1개월 이상 대기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성장판 촬영에만 약 10만원, 혈액·초음파 검사를 추가하면 50만원 후반대 비용이 든다고 한다. 검사 비용만 이 정도며, 실제 성장호르몬 주사 치료를 시작하면 월 최대 100만원 이상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부담스러운 가격이지만, 클리닉을 찾는 학부모는 계속 늘고 있다. 9세 남자아이 학부모 정모씨는 “클리닉에서 5~9세가 ‘골든타임’이라고 안내하고, 우리 아이는 늦게 왔다고 했다”며 “주사를 안 맞으면 160~165㎝까지 크고, 주사를 맞으면 170㎝ 이상 큰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10세 남아 학부모 안모씨도 “주변 부모들은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히는 걸 자랑삼아 얘기하고, 다들 돈만 있다면 맞히고 싶다고 한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성장호르몬 치료가 마치 대세처럼 여겨지며 키가 또래보다 큰 어린이까지 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실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19세 이하 미성년자에 대한 성장호르몬 처방 건수는 2020년 89만5011건에서 2024년 162만1154건으로 4년 사이 2배 가까운 수준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처방액은 596억8100만원에서 1592억5400만원으로 2.6배가 됐다. 처방 건수보다 더 크게 늘어난 것이다.
문제는 처방 건수 증가와 함께 부작용 사례도 늘었다는 것이다. 성장호르몬 주사제의 중대 부작용(폐렴 등) 사례는 2020년 9건에서 2024년 165건으로 급증했다. 게다가 ‘10㎝ up(업)’이나 ‘부모들이 절대 알 수 없는 키 성장의 비밀을 공개한다’는 등의 과장 광고도 늘었고, 키 성장 효과를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려운 자세·체형 관리 업체들도 덩달아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온라인에선 ‘6개월 만에 15㎝가 컸다’ 같이 먹기만 하면 단기간에 키가 크는 것처럼 홍보하는 식품 광고들도 난립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상적인 성장 흐름에 있는 아이까지 분위기에 휩쓸려 주사를 맞는 사례가 많아지는 것은 문제라고 진단했다. 서병규 서울성모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성장호르몬 결핍증이나 터너 증후군 등 명확한 병이 있을 경우 성장호르몬 주사를 권장하지만, 그게 아닌 아이에게도 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주사를 맞으면 무조건 키가 큰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현재 키가 작아도 잘 크고 있는 아이에겐 주사 효과가 크지 않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도 “지난해 병·의원, 약국의 과대광고 여부 등을 점검했고, 올해도 성장호르몬 제제의 안전 관리를 강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