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 가치가 4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달러 약세를 두고 “아주 좋다(it’s great)”고 말하며 하락세에 기름을 부었다. 다른 나라에는 환율 조작을 하지 말라고 압박하면서도, 정작 달러 값 추락을 부추기는 트럼프의 이중적 행보에 세계 금융시장의 변동성도 커졌다.
27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DXY)는 전날보다 1.3% 급락한 95.76을 기록했다. 이는 2022년 초 이후 약 4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4거래일 연속 하락세로, 이 기간 내린 달러 값은 2.6%에 이른다.
달러 값을 주저앉힌 직접적 계기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이다. 이날 그는 최근의 달러 약세에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며 “달러는 아주 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달러를 요요처럼 오르락내리락하게 만들 수 있다”며 개입 가능성을 열어뒀다. 이어 “중국과 일본은 위안화와 엔화를 계속해서 낮추려 했고, 이는 공정하지 않다”고도 했다.
시장은 이를 두고 제조업과 수출에 유리한 달러 약세를 감내하거나 선호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트럼프는 지난해 ‘관세 전쟁’을 치를 때도 “강한 달러를 좋아하지만, 약한 달러는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준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실제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1년간 달러 가치는 약 10% 하락했다. WSJ에 따르면, 달러 대비 유로화는 트럼프 취임 이후 달러 대비 약 16% 상승했고, 스위스 프랑과 멕시코 페소는 각각 19% 이상 올랐다.
시장 전망은 달러 추가 약세 쪽에 기운다. 그린란드 매입을 선언한 트럼프 대통령과 갈등을 빚고 있는 유럽을 중심으로 미 국채 보유 비중을 줄이려는 조짐이 있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독립성을 흔드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속적 압박과 더불어 차기 Fed 의장 선임을 둘러싼 불확실성도 여전하다. 이런 가운데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달러-엔 환율에 대한 ‘레이트 체크’(시세 확인)를 했다. 현재 엔화 가치가 적정한지 점검을 해봤다는 건데, 미 정부가 달러 대비 엔화 값을 끌어올리기 위한 개입을 준비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프라샨트 뉴나하 TD증권 아시아·태평양 금리 수석 전략가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기를 과열시키고, 금리 인하에 소극적인 Fed보다 한발 앞서기 위해 달러 약세를 용인하는 것”이라며 “트럼프가 사실상 달러 매도에 녹색불(허용)을 켜고 있다”고 평가했다.
시장의 불안감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달러 약세가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수출과 재정적자에 도움이 될지 몰라도, ‘셀 아메리카’(미국 자산 매도)를 불러올 요인이라서다. 이미 안전자산 선호가 커지면서 금과 은 가격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바클레이즈의 수석 외환 전략가 레프테리스 파르마키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질서가 흔들리는 것은 장기적으로 달러에 부정적”이라고 평가했다.
달러 가치가 추락하면서 원화 값을 밀어 올리고 있다. 이날 주간 종가 기준 달러-원 환율은 하루 전보다 23.7원 내린(원화 가치는 상승) 1422.5원이었다. 지난 10월 20일 이후 가장 낮은 환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