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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슬의 숫자 읽기] 건전 재정이란 숫자 오독

중앙일보

2026.01.29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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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슬 약사·작가
지난 4년간 연재한 ‘숫자 읽기’의 마지막 글로 딱 하나의 개념만 더 전하고자 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가 제시한 ‘굿하트의 법칙’이다. 굿하트의 법칙이란 특정 지표가 정책 목표가 되는 순간, 그 지표가 더는 쓸모가 없어진다는 역설적인 현상이다. 예컨대 대학 입시에 봉사 활동 시간을 반영하는 건, 학생의 인성을 간접적으로 평가하려는 게 목적이다. 그렇지만 봉사 시간이 점수화되는 순간 모든 학생이 봉사 시간을 부풀리므로 이를 통해 인성을 평가하긴 불가능해진다. 직장인의 야근 횟수로 성실성을 평가하면 불필요한 초과 근무가 늘고, 소비가 부의 척도가 되면 빚을 내서라도 명품을 사는 것과 같은 꽤 보편적 현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재정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이 진행 중이다. 1997년 IMF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우리나라는 강력한 국가부채 억제 정책을 펴왔다. 국가부채를 최대한 옥죄어 나라 살림살이를 유지하잔 목적에서다. 하지만 여기서도 굿하트의 법칙이 작동했다. 정부가 빚을 내지 않으려 허리띠를 졸라매니, 그 부족한 수요와 비용이 고스란히 민간, 특히 가계로 전가되었기 때문이다. 구체적 숫자를 보자. 2024년 기준 우리나라 국가채무는 같은 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59.4% 수준이다. 그런데 같은 해 가계부채는 GDP 대비 90.1%에 달한다. 가계 빚이 국가 빚보다 많은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게 우리나라만의 예외적 상황이란 점이다.

박경민 기자
우리나라와 경제 수준이 비슷한 주요국 국가부채와 가계부채를 비교해보면 가계부채가 국가부채보다 높은 곳은 우리나라가 사실상 유일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영국 워릭대 명예교수 콜린 크라우치(Colin Crouch)는 이를 ‘민영화된 케인스주의’라 명명했다. 국가가 공적 자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해야 할 시점에 그 역할을 포기하고 개인에게 빚을 내어 소비하게끔 유도했다는 것이다. 정부가 국가부채란 정책 목표에 갇혀 지출을 옥죄는 동안, 시민들은 생존을 위해 각자도생격 대출을 받아야만 했다. 당장 코로나19 대유행 때 많이 겪었던 일이다. 그러니 건전 재정이라는 목표는 달성했을지 몰라도, 그 대가로 가계 경제는 파탄의 위기에 내몰렸다. 국가부채 비율이라는 숫자는 정책 목표로서 잘 관리되었으나 나라 살림살이라는 본질은 훼손된 것이다.

이렇듯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숫자를 둘러싼 맥락은 언제든지 우리를 속일 수 있다. 그러니 숫자 자체를 비판적으로 읽는 걸 넘어, 숫자가 만들어지는 방식은 물론 숫자가 이용되는 방식까지도 비판적으로 읽는 태도를 견지해야만 숫자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숫자 읽기 방법이란 걸 기억해주신다면 긴 연재의 마무리로 여한이 없을 것 같다.

박한슬 약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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