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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주의 고려, 또 다른 500년] 정변 가담해 출셋길, 나쁜 권력 옹위하며 승승장구

중앙일보

2026.01.29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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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와 결탁해 활개친 무뢰배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 불행하다.” 10대 학창 시절에 톨스토이의 이 문장을 읽으면서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고 지나쳤다. 그런데 살다 보니 참 옳은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 나름대로 불행하다는 대목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세상에 걱정거리 없는 집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동서고금에 불행 요인이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나. 다만 그것을 찾아서 큰 문제가 되지 않게 관리하면 국운이 연장되고, 만약 그러지 못하면 큰 혼란에 빠지거나 심한 경우 망국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국민 다수가 법을 경시하고 공공연히 어기면 어떻게 될까? 법을 어기는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법의 권위가 실추되어 불법이 만연하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말이다.

계림공 집권 도운 척준경이 첫 사례
권력과의 공생 관계 갈수록 심해져

정중부 죽이고 권력 잡은 경대승
집 안의 사병조직 무뢰배로 채워

국왕 타락하자 무뢰배 온갖 난동
불법 판치는 나라에 미래는 없어

청자 참외 모양 병(위)과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아래). 각각 12세기 전반과 12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청자다. 고려 지배층이 이런 고급문화를 향유하고 있을 때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면서 무뢰배가 출현하고 민란이 발생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국가유산청]
몰락한 집안 자제들의 일탈
고려시대에 무뢰배(無賴輩)란 말이 있었다. ‘성품이 막되어 예의와 염치를 모르고 함부로 행동하는 무리’라는 뜻이다. 대개는 젊은 사람들이어서 악소(惡少·나쁜 젊은이)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길 가는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온갖 범죄를 저질렀고, 대담하게 관청에 불을 지르고 공공 재물을 훔치기도 했다. 법이 있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무뢰배로 이름이 드러나는 첫 인물은 척준경이다. 그는 곡주(황해도 곡산)의 향리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난한 탓에 공부를 하지 못하고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고려시대 향리 자제들은 대개 과거 급제를 목표로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일탈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척준경을 비롯한 무뢰배가 등장하는 시기는 12세기, 고려 중기부터였다. 그때 고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12세기에 고려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앞선 11세기 100년의 평화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1019년 귀주대첩으로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데 이어 적극 외교를 통해 전쟁을 종식시킨 것이 주효했다. 국내 정치도 안정되었다. 11세기 후반 문종의 치세(1046~1083년)에는 각종 제도가 완성되는 등 모든 면에서 국가의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반란이나 정쟁, 민란 같은 큰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라 안팎이 편안한 가운데 농경지가 개간되고 수리 시설이 확충되는 등으로 농업 생산이 늘었고, 그 성과는 다음 세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어두운 뒷면도 있었다. 경제 발전의 국면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었으며, 권력을 앞세운 지배층의 수탈이 일상화되었다. 기회는 누리는 사람들에게만 집중되고 발전의 성과는 소수에게 독점되었으며, 정치적 안정기에 권력을 강화한 지배세력은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그 결과 몰락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그중에서 무뢰배가 되는 사람이 나타났다. 향리 계층에 속한 척준경이 공부를 못 할 정도로 가난했다는 걸 보면 어떤 사정인가로 몰락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회를 살리지 못해 빈곤해진 사람들, 권력자에게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은 당연히 사회에 불만을 가졌을 것이지만 모두가 무뢰배가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수는 소작인이 되거나 심지어 노비가 되기를 감수하고 살길을 찾았다. 어떤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고 타처에서 떠돌며 불안정한 삶을 이어갔다. 무뢰배의 길로 들어선 것은 오히려 극히 소수였다. 그럼에도 무뢰배가 한때의 현상으로 그치지 않은 것은 다른 한 편에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11세기 말에 벌어진 왕위 쟁탈전이 그 시작이었다. 14대 헌종이 어리고 병약하자 왕의 이복동생인 한산후를 옹립하려는 이자의와 왕의 숙부인 계림공이 후계 자리를 놓고 내전을 벌였다. 이때 두 사람 모두 무뢰배로 구성된 사병을 동원했다. 지방의 한낱 무뢰배였던 척준경은 계림공을 따랐고, 계림공이 승리해서 왕위에 오르자(15대 숙종) 벼슬을 얻는 데 성공했다. 무뢰배의 출셋길이 처음 열린 것이다. 그 뒤로는 전쟁이 이어졌다. 12세기 초부터 여진과 전쟁이 시작되자 무뢰배들이 군인이 되어 참전했다. 이 전쟁에서 척준경은 공을 세웠고, 윤관의 눈에 들어 승승장구한 끝에 이자겸과 권력을 다투는 이인자의 자리까지 올랐다. 무신 권력자 이의민도 무뢰배 출신이었다. 고향 경주에서 불량배 짓을 해서 온 고을의 근심거리가 되었는데, 처형되기 직전 그의 완력을 아깝게 여긴 관리의 추천으로 군인이 되어 인생 역전의 기회를 잡았다.

1330년 감색 종이에 은가루로 쓴 묘법연화경. 1181년 사경원에서 은니장경을 만들려고 모아둔 재물을 무뢰배들이 약탈한 사건이 있었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무신정변 이후 무뢰배 세상
1170년 무신정변은 무뢰배들에게 마치 제 세상을 만난 것과도 같았다. 정변 당시 이의민이 사람을 많이 죽인 공으로 승진했다고 하니, 무신들이 만들어준 무대에서 얼마나 많은 무뢰배들이 활개를 쳤을지 짐작이 간다. 정변이 성공한 뒤로는 권력 쟁탈전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쓸모는 더욱 커졌다. 정중부를 죽이고 권력을 잡은 경대승은 자기 집에 도방(都房)이라는 사병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 또한 무뢰배로 채워졌다. 이들은 온갖 불법을 저질렀지만, 경대승의 비호 덕에 처벌받지 않았다. 무신집권기에는 권력자와 연결된 무뢰배가 높은 관직에도 올랐다. 김의원이란 사람이 있었다. 젊을 때 집이 가난해서 무뢰배가 되었는데, 글을 몰랐지만 두 번째로 높은 관직인 평장사까지 올랐다. 권력자와의 관계가 아니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정변과 전쟁이 기회를 만들어준 데 이어, 무신정권 아래 권력자의 필요에 따라 무뢰배의 진출이 점점 더 활발해졌다.

권력자가 무뢰배를 포섭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불법 행위를 비호하거나 관직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적 유대관계를 맺었다. 예를 들어, 경대승은 도방의 사병들과 같은 이불을 덮고 합숙하면서 친밀함을 과시하고 충성을 유도했다. 당시 이런 사람을 ‘호협(豪俠)’이라고 불렀다. 본래는 호방하고 의협심 있는 사람이란 뜻이지만, 그 호방함이란 실은 법을 어기면서 호기부리는 것을 의미했고, 의협심이란 고작 아는 사람의 사정을 봐주거나 청탁을 들어주는 것을 뜻했다. 최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권력자가 된 김준도 호협을 자처했다. 그는 최씨가의 노비였지만 최우의 후원으로 고위직에 올랐는데, 평소 아랫사람에게 공손하고 베풀기를 좋아해서 인심을 얻었다. 날마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시는 바람에 집에 저축이 없었다고 하는데, 재물에 연연하지 않고 술을 좋아하는 것도 호협의 겉모습 중 하나였다. 하지만 자기 재산은 돌보지 않되 국가를 사유화하고 사치를 일삼았으니 이 또한 위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호협과 무뢰배의 결합은 14세기 들어 더욱 심해졌다. 원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 국왕이 자기가 총애하는 폐행(嬖幸)을 앞세워 왕권을 부지했고, 여기에 무뢰배가 끼어들 틈이 생겼다. 국왕이 호협처럼 굴면서 무뢰배들과 어울리기도 했는데, 28대 충혜왕이 특히 그랬다. 이 타락한 국왕은 무뢰배들과 어울리면서 온갖 난동을 부려 백성들을 괴롭혔다. 오죽하면 원에서도 발피(潑皮)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호협 또는 무뢰배를 가리키는 저속어였다. 공민왕에 의해 잠시 정상을 되찾는 듯했던 정치 질서가 우왕 때 다시 무너졌다. 우왕의 국왕답지 못한 행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무뢰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혔고, 어느 집 딸이 예쁘다는 말만 들으면 그 집에 쳐들어가기까지 했다. 국왕이 무뢰배가 되었으니, 왕조의 운명은 불문가지였다.

2011년 충남 태안군 마도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화물선에서 나온 화물 물표. 무신 권력자 김준에게 배달되는 화물에 붙어 있었다. [사진 국가유산청]
민중 저항의 길, 무뢰배의 길
무뢰배가 등장한 근본 원인은 가난이었다. 그 배후에는 경제적 양극화와 지배층의 수탈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먹고살기 어려워진 사람들이 모두 무뢰배가 된 것은 아니었다. 대개는 제각각 살길을 찾았고, 정 안되면 힘을 모아 저항했다. 12세기 후반 전국에서 일어난 민란이 그것이다. 이 경우는 사회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변혁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실제로 고려 민중의 저항은 지배층을 자극해서 위민(爲民), 민본(民本)을 이념으로 새 나라를 만드는 결실을 얻었다. 반면 무뢰배의 행위는 불만을 분출하는 데 불과했다. 왜 그러는지 명분도, 어떻게 하겠다는 목표도 없었다. 자기만 잘살겠다고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약탈해서 문제를 심화시킬 뿐이었다. 무뢰배에게 오염된 정치도 고려가 망한 이유 중 하나이다. 법이 경시되고, 법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

※이 글을 쓰면서 채웅석(가톨릭대) 교수의 ‘고려 중·후기 무뢰와 호협의 행태와 그 성격’(역사와 현실 8, 1992)을 참고했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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