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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 넘었다, 백제왕 기리는 불길

중앙일보

2026.01.29 07:17 2026.01.2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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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미야자키 현의 산골마을 ‘난고촌’에는 백제 왕족을 기리는 축제를 1300여년째 이어오고 있다. ‘시와스 마쓰리’의 하이라이트인 ‘맞이불’이 진행되는 모습. 30여개 불기둥에 불을 붙이고 신사에서 모셔온 백제 왕족의 영령을 들고 행진한다.
지난해 방일 한국인은 946만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민 5.45명에 한 명꼴로 일본을 다녀온 셈이다. 이제 일본에서 한국인이 안 가본 곳은 거의 없다. 섬나라 어느 구석을 가도 한국인이 있다.

오늘 소개하는 규슈(九州)섬 미야자키(宮崎)현의 산골 마을도 가봤는지 궁금하다. 지난 16일 이 오지 마을을 찾아가면서 의문이 들었었다. 한국인이 이런 오지도 올까? 알기는 할까? 물음표는 이내 느낌표로 바뀌었다. 첩첩산중의 두메산골에 1000년 넘게 이어온 한국과의 인연이 숨어 있었다. 한국인이라면 알아야 할 일본의 산골 마을이었다.

마을 주민이 즐기는 음식·술 잔치도
규슈 남동쪽에 자리한 미야자키는 겨울에 찾는 사람이 많다. 제주도보다 따뜻해서 겨울 골프 여행지로 인기가 높다. 야구·축구 같은 프로스포츠의 전지훈련 장소로도 유명하다.

16일 정오께, 야자수 늘어선 미야자키공항의 기온은 20도였다. 약 2시간 차를 타고 산골 분지 ‘미사토(美郷)정 난고(南鄕)촌’에 도착하니 딴판이었다. 오후 5시가 안 돼 어둑해졌고, 금세 싸늘해졌다.

어디나 그렇듯, 산골에서는 밤에 할 게 없다. 쓸쓸하고 심심하다. 이날은 달랐다. 오후 6시 ‘시와스 마쓰리(師走祭り)’를 보기 위해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미카도(神門) 신사 앞 들녘에 불기둥 30여 개를 설치하고 일제히 불을 붙였다. 불길이 10m 이상 치솟았고,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공기가 찜질방처럼 후끈해졌다.

시와스 마쓰리는 무려 1300년 이상 이어졌다. 역사도 장구하지만, 백제의 전설이 서려 있어 더 흥미롭다. 혼란이 극심했던 백제 후기, 왕족이었던 정가왕은 가족을 데리고 일본 나라(奈良)를 거쳐 미야자키로 망명했다. 추격군이 따라붙었고 폭풍우도 몰아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정가왕은 난고촌에 정착했고, 장남인 복지왕은 약 90㎞ 거리의 기조(木城)정에 자리 잡았다. 왕과 아들은 각자의 마을에 농사법을 비롯한 백제의 선진 기술을 전해줬고, 주민들은 백제 왕족을 깍듯이 섬겼다. 그러나 머지않아 추격자들에 의해 왕족이 몰살당했다. 이후 주민들은 정가왕과 복지왕을 신사에 모셨고, 가족의 재회를 연출하는 마쓰리를 열었다.

일본 무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시와스 마쓰리는 음력 12월 18~20일 진행한다. 기조정 ‘히키(比木) 신사’에서 복지왕의 영령(英靈)을 모셔 와 난고촌의 미카도 신사까지 약 90㎞를 이동하는 행사다. 제사를 관장하는 주민들은 왕족이 표착한 바다에도 들어가고, 정가왕의 묘소도 들른다. 이동 중 주요 지점에서 제사를 올리고, 주민이 준비한 음식도 먹는다.

시와스 마쓰리에서 활짝 웃고 있는 주민들. 직접 구운 사슴고기와 소시지, 빙어 등을 맛보라며 건넸다.
마쓰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축제 첫날 밤 ‘맞이불(迎え火)’ 이다. 왕족의 넋을 기리는 의례여서 엄숙할 줄 알았으나 이때만큼은 흥 넘치는 마을 잔치였다. 줄지어 선 음식 부스에서 온갖 먹거리를 팔았고, 주민들은 불기둥 바로 앞에서 고기를 굽고 술잔을 돌렸다. 주민 후지타 히로코(89)가 사슴고기를 건네며 말했다.

“시와스 마쓰리는 우리 마을의 자랑입니다. 축제가 계속 이어지고, 더 많은 한국인이 찾아오길 바랍니다.”

백제 왕족의 선물 ‘미인 온천’
정가왕 이야기는 실화일까.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삼국유사』 에서도 정가왕에 관한 기록은 한 줄도 없다. 그러나 규슈 남동쪽의 산골 마을 난고촌에서 수많은 백제 문화재가 출토된 건 사실이다. 미카도 신사 옆 ‘정창원’에 백제 청동거울 24점과 화살촉 수백 점이 전시돼 있다.

난고촌은 1991년 충남 부여군과 자매결연을 한 뒤 ‘백제관’을 지어 백제와 한국의 문화를 전시하고 있다. 미사토정관광협회 이노마타 토시야스 전무는 “많은 주민이 백제 왕족 덕분에 마을이 발전했다고 굳게 믿는다”고 말했다.

마쓰리를 본 뒤에는 ‘난고온천’을 가봤다. 피부에 좋은 탄산수소염 성분이 강해 ‘미인 온천’이라 불리는데, 마을 주민은 온천 또한 백제 왕족의 선물로 여긴다.

난고여관에서 먹은 저녁식사. 야생 사슴 육회가 고소했다.
520엔(약 4800원)을 내고 노천탕에 몸을 지지면서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봤다. 온천 인근의 난고여관도 가성비가 좋았다. 사슴 육회를 포함한 저녁 식사가 특히 좋았고, 깔끔한 다다미방에서 꿀잠을 잤다.

1000년 넘은 삼나무도 사는 곳
시바촌에 있는 계단식 논. 평지가 드물어서 비탈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는다.
난고촌은 히가시우스키(東臼杵)군에 속해 있다. 산림이 90%인 터라 난고촌의 이웃 마을은 산과 나무를 관광자원으로 내세운다. 모로쓰카(諸塚)촌에서는 목공 체험장에서 나무젓가락을 만든 뒤 표고 덮밥을 먹었다. 시바(椎葉)촌에서는 수령 1000년이 넘는 삼나무가 사는 신사와 산비탈의 계단식 논을 구경했다. 300년 역사의 국가 중요문화재인 ‘쓰루토미(鶴富) 저택’에서는 산천어구이, 멧돼지조림 같은 토속음식을 맛봤다.

300년 역사의 쓰루토미 저택.
산촌에서만 지내면 지루하지 않느냐고? 서핑으로 유명한 도시 휴가(日向)가 지척이다. 주상절리 해변과 새하얀 등대, 동백숲이 어우러진 우마가세(馬ヶ背) 산책로가 그림 같다.

휴가 곶에 자리한 호소시마 등대. 1910년에 벽돌로 만든 뒤 1941년 하얗게 칠했다.
태평양을 보며 걷는 우마가세 산책로.
☞여행정보
정근영 디자이너
아시아나항공이 인천~미야자키 노선을 매일 운항한다. 미야자키현 북부 산골을 가려면 렌터카가 필수다. 미야자키공항에서 빌리면 된다. 난고여관, 쓰루토미 저택은 숙소 홈페이지나 일본 호텔 예약 사이트 ‘자란’에서 예약할 수 있다. 난고여관의 1인 숙박비는 1만1000엔(조·석식 제공, 세금 별도), 쓰루토미 저택은 1인 7000엔.



최승표([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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