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겨 스케이팅 국가대표 이해인(21)은 이제 안다. 어떤 행복도, 불행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벼랑 끝 시련을 딛고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올림픽 출전이라는 기적을 일궈낸 그는 나직이 고백했다. “난 피겨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자책한 시간도 많았지만, 이제는 그 흉터까지 품은 지금의 나를 사랑하기로 했다.”
그의 변화는 은반 위에서 가장 먼저 감지된다. 이번 시즌 프리스케이팅 곡으로 선택한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은 파격 그 자체다. 이해인은 사랑에 휘둘리는 비운의 주인공이 아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여전사’로서의 카르멘을 택했다. 삶이 백만 조각으로 깨지고 부서졌던 경험이 연기에 투영된 덕분일까.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캐릭터의 호소력은 이전보다 훨씬 강렬하고 처연해졌다.
이해인은 본래 ‘포스트 김연아’의 선두주자였다. 2023년 4대륙선수권 우승과 세계선수권 은메달을 따내며 한국 피겨의 역사를 썼다. 그러나 2024년 5월, 이탈리아 전지훈련 중 불거진 성추행 의혹은 평탄하던 선수 생활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연인 사이였던 후배와의 관계를 비밀로 하려다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빙상연맹으로부터 자격정지 3년이라는 가혹한 징계를 받았다. 1년여의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2025년 5월 비로소 누명을 벗었지만, 마음엔 이미 깊은 금이 간 뒤였다.
하지만 그 모진 공백과 고통은, 어쩌면 독이 아닌 새로운 성장의 자양분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시련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말은 자칫 상투적인 위로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제 이해인은 자신의 연기로 그 말을 실재하는 증거로 바꿔 놓았다. 안돼도 끝까지 해내려는 고집은 은반 위에서 성숙함이라는 깊은 색채로 피어났다.
이달 초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보여준 그의 연기는 과거의 정교함을 넘어선 서사적 깊이가 느껴졌다. 우아하면서도 힘차게 뻗는 손끝엔 간절함이 실렸고, 표정엔 풍파를 견뎌낸 자만의 단단한 아름다움이 투영됐다. 4년 전 선발전 탈락의 아픔까지 묵묵히 소화해낸 그는 선발전에서 대역전극을 쓰며 밀라노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이러한 내면의 단단함은 쇼트프로그램 ‘세이렌(Seirenes)’에서도 이어진다. 유혹하는 인어를 표현한 의상 위로 알알이 박힌 진주는 그간 흘린 눈물의 결정체처럼 빛난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의 가사처럼, 그는 이제 “깨진 유리 조각 속에 담긴 아름다움”을 본다. 상처를 숨기지 않고 무대의 일부로 받아들인 순간, 그의 연기는 비로소 완성됐다.
이해인의 시선은 이제 나를 넘어 타인을 향한다. 팬들을 향한 고마움을 담아 직접 굿즈를 제작하고 수익금을 영아원에 기부하며 마음의 근육을 키웠다. 올림픽 갈라쇼 무대를 위해 갓과 부채를 챙기겠다는 그는 벌써 갈라쇼 주제곡으로 케데헌의 OST를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을 드러냈다. 지난해 10월 첫 선을 보여 화제가 됐던 그 곡이다. 갈라쇼는 메달리스트 및 상위 선수들만 초대받는 귀한 무대다.
가장 어두운 밤을 통과한 별이 비로소 제 빛을 찾듯, 시련을 통과하며 한층 투명해진 이해인의 연기는 이제 더 큰 세계를 향한다. 패션의 도시 밀라노에서 검정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상처 입어 더 아름다운 한국의 선율을 각인시킬 그의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찬란한 극복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