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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복원력 믿어달라" 미 원화절상 압력 멈춘 그 말

중앙일보

2026.01.29 12:00 2026.01.29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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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일 회고록] 경제국정, 이랬다 ②

제임스 베이커 미국 재무부 장관은 1988년 2월 제6공화국 출범과 노태우 대통령 취임 경축 사절로 방한했다. 미 재무부 장관으론 처음 정부과천청사의 재무부 장관실도 찾았다.
1987년 미국 워싱턴과 88년 독일(당시 서독)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IBRD) 연차총회 때 나는 총회장 밖에서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가 있어 남달리 바쁘게 뛰어야만 했다.

당시 한·미 간 현안이었던 환율과 자본시장 개방 문제 해결을 위해서다. 87년 워싱턴에서는 제임스 베이커 미 재무부 장관과 그리고 88년 베를린에서는 니컬러스 브래디 장관과 비공개로 만나 우리가 원하는 해결책에 합의를 이끌어내야 했다.

87년 총회 즈음 한국 경제는 ‘6·29 민주화 선언’에 따른 민주화 열풍이 불었다. 이와 함께 8~9월에만 3000건 이상의 노사분규 발생과 20%에 이르는 높은 임금 인상으로 큰 충격 속에 놓여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미국은 원화 가치 절상 압력을 계속해 왔다. 특히 우리와 비슷한 입장에 있던 대만 통화의 절상을 유도하기 위해 한국을 더욱 압박했다.

당시 대만과 한국에 대해 강성 일변도로 압력을 가해 온 데이비드 멀퍼드 미 재무부 차관보는 총회 이전에 수차례 한국을 직접 방문해 환율 문제를 해결하자고 연락했다. 내가 계속 안 된다고 하자 그는 대만에 가는 길에 공항에서라도 한국 실무자와 만나자고 우기기까지 했다.

나는 베이커 장관에게 당시 우방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인 미국의 모양새는 양국 관계뿐 아니라 미국 국익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칫하면 환율 문제가 정치 이슈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언론의 관심이 집중될 수 있는 멀퍼드의 방한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수차례 서신을 보냈다. 아울러 딕시 워커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조지 슐츠 미 국무부 장관의 도움도 청했다.

어쨌든 멀퍼드 차관보의 방한은 막아냈다. 대신 베이커 장관이 9월 워싱턴 IMF-세계은행 총회에서 나와 만나자고 했다. 한국의 입장을 설명할 좋은 기회로 생각해 철저한 사전 준비를 했다.

미국 내 우군을 확보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우선 베이커 장관과는 공사 간 친밀한 관계며 미 정부의 국제무역·환율 분야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프레드 버그스텐 IIE(국제경제연구원, 현 PIIE) 원장에게 연락했다. 총회 전 한국의 경제 현황과 전망, 특히 6·29선언 이후 노동시장과 노사관계 변화, 한·미 통상·환율 관계 전반에 관한 나의 공개 강연회를 IIE가 주선해 주길 부탁했다.

당시 미국 조야에서는 6·29선언 이후 한국의 정치·경제와 한·미 관계의 미래에 대한 관심이 한창 고조돼 있었다. 강연에는 미국 정부와 IMF·세계은행 고위 인사를 포함한 학계·업계·언론계 주요 인사 120여 명이 참여했다. 제프리 프랭클 하버드대 교수, 휴 패트릭 컬럼비아대 교수, 루디 돈부시 MIT 교수 등 유명 석학도 참석했다.

나는 워싱턴 만찬 연설에 앞서 같은 날 경유지인 뉴욕에서 아시아소사이어티와 한·미소사이어티가 공동 주최한 오찬 연설도 했다. 한·미 관계 특히 한국 경제에 관심이 많은 1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워싱턴 도착 즉시 나는 버그스텐과 환율 관련 세계적 권위자인 존 윌리엄스 IIE 수석연구원, 프라바카 나베카 IMF 아시아 국장 등과 개별적으로 만났다. 한국의 가파른 명목임금 인상과 물가 상승 압력으로 한국 기업의 국제경쟁력은 그만큼 하락했다. 따라서 미국의 환율 압력은 당분간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들의 동감을 얻어냈다.

이와 함께 6·29선언에 따른 정치·경제적 충격은 한국의 새로운 노사관계 정립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구조 개편을 촉진해 길게 보면 한국 경제 발전에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음을 밝혔다. 한국 경제에 대해 중장기적으로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버그스텐에게 개인적 도움을 요청했다. 베이커 장관을 총회 폐막 전에 좀 설득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베이커 장관과 총회 중 미 재무부 장관 집무실에서 비공개 회의를 했다. 한국에 대한 환율 압력은 당분간 멈춰 달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한국 경제의 복원력을 믿는 나는 6개월 정도 조정기를 지나면 한국 경제는 정상 성장 궤도로 돌아올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6개월 정도는 기다려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총회 마지막 날 폐막 리셉션이 열렸다. 이 자리에 미국 측 초청 인사로 버그스텐도 참석했다. 내가 우리 대표단 일행과 리셉션장에 막 들어서니 마침 베이커와 버그스텐 둘이 대화하고 있었다. 나를 본 버그스텐이 베이커가 보이지 않게 뒤에서 손가락으로 ‘O자’를 그려 보여줬다. 나의 주장을 베이커가 받아들였다는 반가운 사인이었다.

그해 12월까지 원화 절상은 일단 멈췄다. 놀랍게도 한국 경제는 8월 한 달 멈칫하다 9월부터 빠른 성장세로 되돌아섰다. 10월 들어 수출은 거의 30% 큰 폭으로 증가했다. 12월에 미국 측이 원화 절상 재개를 요구했고, 절상은 그 이후 재개됐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비서실장, 부시 행정부의 국무부 장관을 지낸 베이커 재무부 장관은 미 정·재계 거물이다. 일본 엔화의 대폭 절상을 성사시킨 85년 플라자 합의와 제3세계 부채 문제 완화를 위한 ‘베이커 이니셔티브’의 주역이다.

나는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었던 86년 뉴욕에서 개최된 ‘개도국 외채와 무역에 관한 정상회의’에서 베이커 장관을 처음 만나 환율과 관련해 의견 교환을 한 적이 있다. 베이커 장관은 88년 2월 제6공화국 출범과 노태우 대통령 취임 경축 사절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때 미 재무부 장관으로서는 처음으로 정부과천청사의 재무부 장관실(401호)을 예방해 나의 장관 연임을 축하해 줬다. 솔직히 그는 내가 새 정부에서도 계속 재무부 장관에 연임되리라고 예상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임을 더욱 축하한다고 덧붙였다.

둘 다 정부를 떠난 후 94년에 베이커가 만찬 기조연설자로 참석한 싱가포르 국제회의에 나도 참석한 적이 있다.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명단에서 내 이름을 본 그가 만찬 시 본인 옆에 나를 앉혀 달라고 주최 측에 부탁했다고 한다. 공항에 마중나온 주최 측 인사가 이를 말해 줬다. 그 이후 베이커는 서울에 들러 두 차례(94년, 2008년)에 걸쳐 세계경제연구원에서 강연하는 등 친교를 이어 왔다.

미국 재무부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니컬러스 브래디 장관의 초상화. [사진 미 재무부]
베이커 후임으로 막 취임한 브래디 미 재무부 장관과는 한·미 간 또 다른 현안이었던 자본시장 개방 문제로 88년 9월 베를린 IMF·세계은행 총회 때 만나야 했다. 브래디 장관은 레이건과 부시 양 행정부의 재무부 장관을 맡은 금융계 출신 정치인이다. 그는 제3세계 외채 위기와 채권은행 부실 문제 해결을 위해 89년에 도입한 ‘브래디 채권’ 발행을 주도한 인물이다.

당시 한국 증권시장 개방에 대한 미국 측의 요구는 당장 크게 개방하는 빅뱅(big bang) 방식이었다. 사실 미국의 이러한 개방 압력과 관계없이 증권시장의 육성과 궁극적인 대외 개방은 한국 정부의 주요 정책 과제였다. 그러나 정부의 다각적인 노력에도 자본시장 기반은 아직 취약했다. 더욱이 미국 측이 요구하는 빅뱅식 대폭 개방은 무리였다. 따라서 재무부 실무진으로 하여금 사전에 자본시장의 점진적 대외 개방을 위한 계획을 마련해 브래디 장관을 설득하기로 했다.

그래서 총회장 내 제3의 장소에서 브래디 장관과 비밀리에 만났다. 브래디는 알려진 대로 말수가 적고 남의 말을 경청하는 스타일이었다. 반면에 회의를 주도한 멀퍼드 차관보는 변함없는 강성 일변도였다. 당장 미국 투자자들이 한국 증권시장에 직접 투자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먼저 정부의 증권산업 육성을 위한 우량기업 공개 촉진 정책과 함께 증권 수요 촉진을 위한 각종 시책을 소개했다. 우리의 순차적 자본시장 개방 구상은 미국 투자자에게도 도움이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멀퍼드는 막무가내였다. 그래서 내가 가만히 듣고만 있던 브래디 장관에게 “당신이 나의 입장에 있다면 지금 내가 제시한 구상보다 더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얼굴에 손을 괴고 듣고만 있던 브래디는 나직한 소리로 “당신의 이 구상을 어떻게 믿나?”고 했다. 그래서 나는 “국내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구체적 방안을 국내외에 공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12월에 ‘자본시장 국제화의 단계적 확대 추진 계획’이 발표됐다. 이 계획은 내가 퇴임한 이후에도 거의 그대로 집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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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일([email protect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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