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완벽한 AI가 올수록, 인간의 결핍은 더 비싸질 것이다 [이용해 변호사의 엔터Law 이슈]

중앙일보

2026.01.29 19:00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지난해 12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됐다. 연합뉴스
PD 시절, 편집실은 '제3의 창작'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밋밋한 장면에 긴장감을 불어넣고, 순서를 바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그것을 '연출의 마법'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시절의 편집엔 어디까지나 찍어온 '원본'이 존재했다.

변호사가 되어 바라본 2026년의 미디어 현장은 이제 원본 없는 마법을 부린다. AI(인공지능)가 대본을 쓰고, 가상 배우가 연기를 한다. 하지만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나는 역설적으로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되었다. "AI가 완벽해질수록, 인간의 불완전함엔 더 비싼 값이 매겨질 것이다."

2026년 1월 22일부터 시행된 AI 기본법은 이 흐름의 신호탄이다. 현장에 가장 먼저 닿는 조항은 제31조 '투명성' 조항이다. 생성형 AI가 만든 결과물에 그것이 생성형 AI에 의해 생성되었다는 사실을 이용자가 식별할 수 있도록(사람 또는 기계가 판독 가능한 방식으로) 고지·표시하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규제라 투덜대지만, 나는 이것을 인간 창작물 가치 증명의 원년으로 본다. 그 이유는 AI의 본질적 한계에 있다.

AI는 '선'을 넘지 못한다 - 모델 붕괴와 안전함의 역설
지난해 2월 한국에서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할리우드 SF 영화 '미키 17'. 복제인간을 소재로 인간의 존엄과 노동가치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최근 AI 학계의 화두는 '모델 붕괴(Model Collapse)'다. AI가 만든 데이터를 다시 AI가 학습하면, 데이터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결과물이 뭉개지는 현상이다. 쉽게 말해 '디지털 근친상간'이 낳은 기형적인 평범함이다.

PD의 관점에서 보자. 방송 제작 현장에서 가장 경계하는 것은 '안전하고 뻔한 것'이다. 대중은 도파민을 자극하는 '선 넘는 재미''날카로운 풍자''불편한 진실'에 열광한다. 하지만 AI는 태생적으로 '안전 필터'를 달고 있다. 리스크를 회피하고 통계적인 평균값을 내놓도록 설계된 AI는 절대 싸이(PSY)의 'B급 감성'이나 봉준호의 '디테일한 삑사리'를 흉내 낼 수 없다. 데이터상으로는 '위험'하니까.

20년간 PD로 일하며 수백 편의 대본을 읽었다. 문법적으로 완벽한 대본이 참패하고, 맞춤법 틀린 대본이 국민 드라마가 되는 것을 봤다. 차이는? 공감이었다. 작가가 겪은 이별의 아픔, 직장에서 받은 부당한 대우. 그 체험된 감정이 스며든 대본은 AI가 생성한 천 개의 문장보다 강했다.

앞으로 대중은 "이거 AI 냄새나는데?"라며 매끈하지만 영혼 없는 콘텐트를 귀신같이 걸러낼 것이다. 인간 작가의 역할은 이제 정보 나열이 아니다. AI가 흉내 낼 수 없는 '행간의 뉘앙스'와 '고의적인 불규칙성'을 설계하는 것. 그것이 인간 창작자가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다.

불완전성이 사치재가 된다 - Human-Made 인증의 시대
지난해 10월 개봉한 AI 제작 영화 '중간계'. 강윤성 감독이 AI(인공지능)와 함께 만든, AI를 활용한 국내 첫 장편영화다. 사진 포엔터테인먼트
마트에 가면 모양이 제각각이고 벌레 먹은 유기농 채소가 더 비싸다. 콘텐트 시장도 마찬가지다. 매끈한 AI 생성물이 범람할수록, 인간의 땀과 감정이 들어간 창작물은 희소성 있는 '명품'이 된다.

한국 저작권법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 표현된 것만을 보호한다. 미국도 저작권 보호의 전제로 '인간 저작자성(human authorship)'을 요구한다.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콘텐트는 자산으로서의 안정성과 가치를 모두 잃게 된다. 따라서 앞으로 비즈니스 현장에서는 '인간의 창작적 기여도(Human Contribution)'가 곧 작품의 몸값을 결정하는 핵심 기준이 될 것이다.

계약서도 바뀔 것이다. 단순히 결과물의 퀄리티를 넘어, '얼마나 순도 높은 인간의 창작인가'가 단가를 결정하는 항목이 된다. 앞으로는 AI 활용 여부·범위 고지, 인간의 창작적 기여도 최소 비율(Human Contribution Percentage) 같은 조항이 계약서에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저작권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온전한 재산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AI의 기술력이 아닌 작가의 고유한 창작 지분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AI 기본법이 요구하는 '투명성'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당신의 콘텐트가 '누구나 만드는 공산품'인지, 아니면 '권리를 보호받는 수제품'인지를 밝히라는 것이다.

과정이 곧 자산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 시즌 2의 한 장면. 재치있으면서도 섬뜩한 기운이 감도는 '오징어게임'의 세트를 완성한 채경선 미술감독은 시즌 1과 2로 미국 미술감독조합상(ADG)를 수상했다. 사진 넷플릭스
효율성만 따지면 AI가 압승이다. 버튼 하나면 시놉시스 100개가 나온다. 하지만 인생의 목적이 '결과물 생산'에만 있을까?

빌 퍼킨스의 책 『Die with Zero』는 경험이 곧 인생의 배당금을 주는 자산이라고 말해준다. 글을 쓰며 머리를 쥐어뜯는 고통, 촬영장에서 밤을 새우며 느끼는 피로와 희열. 이 비효율적인 과정 자체가 내 인생을 구성하는 경험이다. 결과물을 AI에게 맡기는 건, 내 삶의 가장 치열한 경험을 기계에 '외주' 주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 과정의 축적이야말로 ‘인간 저작자성’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어, 훗날 분쟁이 생겼을 때도 내 권리를 지켜주는 자산이 된다.

나의 삐딱한 시선, 나의 촌스러운 문체는 내가 살아온 인생의 총합이다. AI는 1초에 100개의 시놉시스를 쓸 수 있다. 하지만 그중 어떤 것이 2026년 한국 시청자의 심장을 칠지는 모른다.

그 선택의 순간, 인간이 필요하다. AI는 통계적으로 가장 무난한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명작은 '무난한 선택'에서 나오지 않는다. '응답하라 1988'의 남편감 선택, 'SKY 캐슬'의 파격적 엔딩, '오징어 게임'의 시각적 디자인. 모두 AI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이다. AI는 흉내 낼 수 없는 그 고유한 불완전함, 그것이 바로 '나'의 경쟁력이다.

규제를 넘어 '증명'의 시대로
2023년 5월 2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 선셋대로에 있는 넷플릭스 본사 앞에서 미국작가조합(WGA) 소속 작가들이 파업에 돌입,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2023년 할리우드 대파업에서 1만 1500명의 작가가 외친 구호는 "AI 반대!"가 아니었다. "Writers are not AI!" (작가는 AI가 아니다!)

그들이 처절하게 싸운 진짜 이유는 하나였다. AI가 쓴 초안을 다듬기만 하는 '저임금 편집자'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결국 미국작가조합(WGA)은 "AI는 '작가'로 크레딧 될 수 없다"는 합의를 쟁취하며 인간 창작의 존엄을 지켜냈다.

창작자 여러분, AI라는 도구 뒤에 숨지 마시라. 당신의 그 불완전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위험한 인간성을 마음껏 드러내시라. 그것만이 AI의 평균주의를 이기는 유일한 무기다. AI 기본법이 요구하는 투명성은 결국 이것을 묻고 있다. "당신의 창작에는 AI가 흉내 낼 수 없는 무엇이 있는가?"
필자소개
이용해 변호사
이용해 변호사는 SBS 등에서 20년간 PD 및 제작사 대표로 활동하며 콘텐트 산업의 최전선을 지켰다.
이후 변호사가 되어 법무법인 화우 파트너변호사를 거쳤으며, 현재 YH&CO 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동아방송예술대학교 겸임교수 및 국제인공지능윤리협회 자문변호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풍부한 제작 경험과 법리를 융합한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전문 변호사로서 업계의 다양한 분쟁들을 해결하며 창작자들을 위한 지식 나눔과 사회적 담론 제시에 앞장서고 있다.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