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제임스 헬러 주한 미국 대사대리가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제1수신자로 “디지털 이슈와 관련해 미국 기업을 차별하지 말라”는 서한을 발송한 건 정부 안팎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 미국 대사대리가 통상적인 ‘공관↔외교부’ 채널을 건너뛰고 관련 정책 결정권자인 부총리에게 직접 서한을 보낸 건 관가의 주목을 끌만한 일이었다. 2주 뒤인 26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기습적으로 관세 재인상을 발표하자 헬러 대사대리의 서한은 사실상 사전경고였다는 해석이 나왔고, 정부는 서한이 관세와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으며 진화에 나섰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서한을 ‘트럼프 행정부의 불가측성’이나 ‘전방위적 쿠팡의 대미 로비전의 결과물’로 해석하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화해 제대로 된 대응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지적도 동시에 나온다. 자국 기업이 걸린 문제에서 미국의 이런 공격적 반응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교가에선 이를 미국 외교 특유의 실리 추구가 재현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한·미 관계가 공고했던 박근혜 정부 때도 유사한 일이 존재했다. 꼭 10년 전인 2016년 1월 18일 마크 리퍼트 당시 주한 미국 대사는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실을 찾았다. 외교부나 다른 정부 부처가 아닌 입법의 현장인 국회를 리퍼트 대사가 직접 찾아온 것은 그 달에만 두 번째였다.
리퍼트 대사는 이상민 당시 법사위원장과 마주 앉아 준비해온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미국과 영국, EU, 호주 대사가 공동 서명한 항의 서한이었다. 리퍼트 대사가 문제 삼은 대목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법률시장 개방 내용을 담은 ‘외국법자문사법 개정안’ 중 외국 로펌의 합작법인 지분율을 49%로 제한한 조항이었다.
리퍼트 대사는 서한에서 “자유무역협정(FTA) 이행 차원에서 지난해 법무부가 마련한 외국법자문사법 개정안은 한국과 외국 로펌의 합작법인 설립에 제약을 준다”며 해당 조항 삭제를 요구했다. 서한 끝부분에는 ‘참조’ 표시와 함께 당시 김현웅 법무부 장관과 윤병세 외교부 장관,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안종범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의 이름을 적었다.
이 위원장은 당시 기자들에게 “법무부에서 정부 부처끼리 다 의논된 사항이라고 해서 믿었는데, 왜 대사들이 나를 찾아오느냐”며 리퍼트 대사의 거듭된 방문에 당혹감을 보였다. 외교 사절이 주재국의 입법 기구를 방문해 특정 조항 수정을 종용하자 당시 정치권과 법조계는 ‘주권 침해’까지 거론하며 반발했다.
리퍼트 대사는 역대 주한 미 대사 중 가장 한국의 이익을 존중하는 데 적극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자녀에게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고, 흉기 피습 사건 뒤에도 자신은 물론 가족도 한국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껄끄러운 상황이 생길 때면 주저 없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핫라인을 가동해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는 그를 두고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하늘이 내려준 대사”라며 고마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리퍼트 대사도 미국 기업의 이익 문제에서는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다.
2003년 토머스 허버드 전 대사도 한·미투자협정(BIT)과 연계해 스크린 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제) 축소를 전면에 내건 적 있다. 그는 그해 7월 대한상공회의소 주최 행사에서 “미국은 스크린쿼터가 한·미투자협정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양자 투자협정은 완전할 수 없다”며 압박 수위를 끌어 올렸다. 이는 2006년 우리 정부가 의무 상영 일수를 축소하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이 장면들의 공통점은 미국 기업의 이익이 정부·여당의 방침과 맞부딪히는 지점에서 미국이 예외 없는 압박을 가해왔단 점이다. 이에 대해 한 외교 소식통은 “결국 외교란 자국 이익 보호가 관건”이라며 “미국은 한층 더 그렇다. 동맹국에도 예외를 두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이미 오래 전에 형성된 워싱턴 조야의 기류인데, 트럼프 탓, 쿠팡 탓만 하다가는 사안 대응에서 초점이 빗나갈 수 있단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문제는 트럼프 행정부의 ‘마이웨이’ 기조와 맞물려 미 대사관을 통한 직접 압박이 앞으로 빈번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는 정부나 정치권의 반발과 맞물려 자칫 반미 여론 확산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이미 지난 28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긴급현안질의에서 헬러 대사대리 서한을 두고 외교적 결례 논란이 도마 위에 올랐다. 김준형 조국혁신당 의원은 조현 외교부 장관을 향해 “원래 항의하셔야 한다”며 “부차관보급인 대사대리가 (주재국) 장관한테 유감을 표하는 것이 맞나. 이러니깐 당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또 “‘트럼프가 트럼프했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데 왜 우리 정부를 들볶나”란 말도 덧붙였다.
청와대도 “아주 중요한 일은 대사대리를 통하지 않고 장관 간 양자 라인을 활용한다. 보도 경위는 짚이는 데가 있는데, 자기들이 했다고 그런 내용을 (언론에)흘린 것 같은데 참 문제가 있어 보인다”(28일 김용범 정책실장)며 서한 발송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데 노골적 불쾌감을 표했다.
다만 어쨌든 미국과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에서 감정적 대응은 결국 정부의 운신 폭이 한층 좁혀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면이 악화일로로 치닫기 전 정부·여당의 섬세한 상황 관리가 강조되는 이유다. 관련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미국은 자국 이익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며 “감정적 대응으로 인해 쿠팡 사태가 통제 불능의 외교·통상 분쟁이 번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정교하고 차분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