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는 일본 최초 여성 총리라는 역사적 타이틀을 갖게 됐다. 그러나 그의 승리가 일본 여성 권리 진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난해 10월 21일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총재가 일본 중의원(하원) 본회의에서 열린 총리 지명 선거 1차 투표에서 과반을 확보, 제103대 일본 총리로 선출됐다.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가 탄생한 역사적 순간을, 크리스틴 로벅 코넬대 역사학과 조교수는 이렇게 평가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여성 정치를 하지 않는’ 여성 총리다. 총리 취임 전부터 여성에 의한 황실 계승이나 동성결혼 등 페미니즘, 성평등 이슈에 반대해 온 다카이치 총리는 취임 후에도 일관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총리 취임 전 선거 기간엔 다른 행보가 예상되기도 했다. 다카이치 총리가 당시 “일본 정치계의 심각한 성별 격차를 줄이고, 여성 각료 수를 사회적으로 진보적인 북유럽 국가들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과감한 공약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총리관저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다카이치 내각의 총 19명 중 여성은 다카이치 총리, 1982년생(43세)으로 내각 최연소인 오노다 기미 경제안보 담당상, 가타야마 사쓰키 재무상 등 단 3명(약 15%)이다. 심지어 저출산담당상인 기시와다 히토시도 남성이다. 북유럽 국가들의 내각에서 여성 각료의 비율이 40~50%에 이르는 것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해 10월 기자회견에서 내각 내 성별 불균형에 대한 질문을 받자 “기회 균등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고,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했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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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천장 깬 ‘여성’이기보다 아베 계승자 자처
‘최초의 여성총리’라는 타이틀을 단 다카이치의 등장은 일본 정치의 유리천장을 깼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찰관인 어머니와 자동차 회사 직원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평범한 집안 출신 여성이 고이즈미 신지로 현 방위상 등 막강한 정치 가문 출신의 두 남성 후보를 제치고 총리가 됐다는 사실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러나 다카이치는 자신이 유리천장을 깬 ‘여성’으로 기억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보다는 지난 2022년 7월 피습으로 사망한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계승자임을 자처한다.
카즈토 스즈키 채텀하우스 아시아태평양 프로그램 전 연구원은 “다카이치 총리는 아베 전 총리가 추진했던 새로운 안보 협력 관계 구축, 국방비 증액, 자위대 권한 확대 등의 적극적인 일본 외교 정책을 계승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일본 정치·젠더 정치 전문가인 유카리 이스턴도 동아시아 포럼 기고문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아베 전 총리의 총애를 받았던 인물로, (아베 전 총리처럼) 완화적인 통화 및 재정 정책을 통한 경제 성장을 선호한다”며 “국가 안보에 관해서도, 적어도 일본 기준으로는, 방첩법 제정 및 평화헌법 개정을 지지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보여 왔다”고 설명했다.
다카이치 입장에서 여성이나 젠더 이슈를 전면에 내세우는 게 불리해 불가피한 선택이란 분석도 있다. 실제 여론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다카이치 총리의 핵심 지지층은 남성 비중이 큰 자민당 보수파 등 전통 보수주의자들이다.
일본 청년 운동가 노조 모모코는 로이터통신에 “다카이치 총리는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에 뿌리를 둔 보수 성향의 정당인 자민당에서 드물게 부상한 여성 정치인”이라며 “남성 중심 사회에 최대한 순응함으로써 그 자리에 올랐다”고 짚었다. 이어 “그는 자신의 우상인 마거릿 대처처럼 유리 천장을 깨부순 여성이지만, (총리로서) 여성의 편에 서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