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지난 28일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방문해 고인과의 인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김 전 위원장과 고인은 보수·진보 진영에서 각각 ‘킹 메이커’로 일컬어지는 대표적 인사다. 김 전 위원장은 장례식장에서 기자들의 질의를 한 차례 거부하다 “요새 같은 장수 시기에 너무 빨리 돌아가지 않았나 싶다”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두 사람의 특별한 ‘악연’은 3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인과 김 전 총리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 출마해 첫 경쟁을 벌였다. 당시 정치 신인이던 고인은 재선 의원인 김 전 위원장을 꺾었다. 고인은 이후 관악을에서만 내리 5선(13~17대)을 했다. 고인은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김 전 위원장과 다시 마주한다. 김 전 위원장은 18대를 건너뛰고 19대 총선부터 세종으로 지역구를 옮긴 고인을 단칼에 공천에서 컷오프(원천 배제)했다.
낙천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당선한 고인은 민주당에 복당했다. 그는 당시 주변에 억울함을 강하게 호소했다고 한다.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지난 27일 페이스북에 “이 전 총리가 ‘내가 민주당에서 컷오프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 못 했다’고 하더라”며 “이 전 총리가 ‘눈앞이 깜깜해서 집으로 가서 아내를 붙들고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고 비화를 전했다.
지난 28일 늦은 저녁 빈소를 찾은 윤재옥 국민의힘 의원은 2004년 노무현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으로 파견된 연이 있다. 윤 의원은 빈소에서 “이 전 총리께서 총리 시절 (제가) 공직에 있었고, 19대 국회 때 같은 상임위원회에 있었다”며 “민주화 발전 과정에서 역할을 하신 분이고 당은 달라도 조문하고 조의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에서 한때 ‘친노’로 평가받던 조경태 국민의힘 의원도 빈소를 찾아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하는 데 헌신한 노력은 우리 후배 정치인들이 많이 본받아야 한다”고 애도했다.
‘고향(충남 청양) 후배’라는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도 같은 날 “진영이 다르더라도 애도를 표하는 것이 정치의 도리”라며 “제 조부께서 시골 면장을 했는데, 고인의 부친이 많은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고인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의정 활동을 함께했다. 나 의원은 지난 29일 “민주당의 가치에 가장 충실한 분”이라며 고인을 회고했다.
정치적 동지로 동고동락하다 멀어진 이들도 빈소를 찾았다. 7선 의원 출신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은 지난 28일 조문객을 받기 전인 이른 아침 빈소에 도착했다. 정 이사장은 2002년 대선 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했지만, 돌연 파기 선언을 했다. 정 이사장은 조문을 마친 뒤 “(고인과) 13대 국회부터 같이 일을 하면서 서로 가깝게 지냈다”며 “항상 열심히 새로운 분야에 관심도 많고 열심히 공부하는 분이라 많은 것을 배웠다”고 애도했다. 총리-외교통상부 장관으로 호흡을 맞췄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이 전 총리를 같이 모시고 일하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