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용산 아이파크몰 6층. 일본 유명 만화 잡지 주간 소년 점프의 공식 굿즈를 판매하는 ‘점프샵’ 팝업스토어 앞은 이른 아침부터 인파로 붐볐다. 사전 예약은 이미 마감됐고, 현장 대기 줄은 매장 밖 복도까지 이어졌다. ‘원피스’ ‘하이큐’ 등 인기 일본 애니메이션 상품을 바구니에 가득 담은 방문객들의 표정엔 망설임이 없었다. 이 팝업은 지난해 2월 일주일간 매출 5억원을 기록한 바 있다. 같은 층 가챠(캡슐 뽑기) 매장에선 인기 애니메이션 ‘주술회전’ 신제품 입고 소식에 인파가 몰리며 1인당 구매 수량을 제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음지 문화’로 치부됐던 서브컬처가 도심 대형 상권의 주류 콘텐트로 부상하고 있다. 굿즈와 한정판 소비에 익숙한 2030을 중심으로 수요가 늘어나고 있어서다. 서브컬처는 주류 문화와 구분되는 특정 집단의 하위문화를 뜻한다. 마니아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애니메이션·게임·캐릭터 IP(지식재산권)가 대표적이다. 과거에는 ‘오타쿠 문화’로 뭉뚱그려지며 주변부에 머물렀지만, 최근엔 주요 유통 채널과 상권의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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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홍대에 생긴 ‘성지’…서브컬처가 상권을 바꿨다
이런 변화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용산이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용산역 일대는 조립 PC 등 전자기기의 성지였다. 그러나 유통의 무게추가 온라인으로 급격히 기울면서 오프라인 상권은 고사 위기를 맞았다. 대형 이커머스의 직매입 공세 속에 영세 매장들은 1~2%대의 극악한 마진율을 버티지 못하고 줄폐업했다. 이를 대신한 게 서브컬처다. 조립 PC 황금기 시절 용산 상가 구석구석에 자리하던 일본 직수입 피규어와 비디오 게임, 가챠 매장들이 전면에 나선 거다.
상권 변화의 조짐은 201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파크몰은 그해 대원미디어와 손잡고 건물 6층에 3300㎡(약 1000평) 규모의 애니메이션 테마파크 ‘팝콘D스퀘어’를 조성했다. 일본 최대 굿즈숍 애니메이트 국내 1호점을 유치한 데 이어, 최근 1~2년 사이에는 이를 넓혀 6층 전체로 확대했다. 현재 아이파크몰 6층은 반다이남코코리아 공식 가챠샵과 건담 베이스, 애니메이션 전용 전시 공간이 가득 들어찬 독보적인 성지가 됐다. 집객 효과는 숫자가 증명한다. 지난해 8월 3층에 선보인 ‘도파민 스테이션’은 개장 50여 일 만에 누적 방문객 100만 명을 돌파했다. 국내 최대 규모의 닌텐도 전문 스토어와 일본 피규어 전문 업체 코토부키야의 국내 첫 공식 매장이 입소문을 타며 전국구 집객력을 확보한 결과다.
또 다른 상권은 홍대역 인근이다. 홍대역은 서브컬처 팬들 사이에서 ‘성지순례’ 코스로 꼽힌다. 젠트리피케이션 이후 침체를 겪던 홍대는 2021년 이후 일본 도쿄의 아키하바라를 빗댄 ‘홍키하바라’로 불리며 재조명받고 있다. 애니메이션·게임·피규어 소비가 일상화된 아키하바라와 달리, 홍대는 이를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공간이다. 대형 쇼핑몰과 길거리에선 인기 IP 팝업과 굿즈숍을 쉽게 볼 수 있다. 집사 카페·메이드 카페 등 일본풍 이색 카페도 빠르게 늘었다. 지난 16일 AK플라자 홍대점에서 열린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 팝업 스토어에는 오픈 직후 100명 넘는 인파가 몰리며 대기 시간이 4시간에 달했다.
과거 ‘숨덕’(숨어서 덕질하는 사람)이던 직장인 윤영태(36) 씨는 “예전엔 취향을 드러내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됐다”며 “시내 중심에서도 즐길 수 있는 콘텐트가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직장인 유모(29)씨는 “학창 시절엔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굿즈를 하나 사려면 일본에 직접 가야 했는데, 이제는 대형 쇼핑몰 중심에서 편하게 살 수 있어 좋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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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이 키운 팬덤…취향이 산업으로 성장
서브컬처의 대중화 배경에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와 게임 플랫폼의 확산이 있다. 지난해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568만 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게 대표적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전문 플랫폼 라프텔은 월간활성이용자수(MAU)가 지난해 상반기 100만 명을 넘어섰다. 2020년 20만~30만 명 수준에서 5년 사이 5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런 흐름은 게임 시장에서도 포착된다. 게임은 단순한 소비를 넘어 캐릭터와 세계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팬덤을 축적하는 플랫폼으로 통한다. ‘원신’(호요버스) ‘블루 아카이브’(넥슨) ‘승리의 여신: 니케’(시프트업) 등 서브컬처 기반 게임들은 이용자 간 교류와 2차 창작을 통해 팬덤을 키우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서브컬처 게임 시장 매출은 최근 3년간 약 41% 증가했으며, 연평균 성장률(16.7%)은 전체 게임 시장 평균(5.2%)의 3배를 웃돈다.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경험은 소비자 인식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의 ‘2025 주류 vs 비주류 문화 인식 조사’에 따르면 ‘개인의 취향에 맞춘 비주류 문화가 대세’라는 응답은 1년 새 32.3%에서 38.3%로 늘었다. ‘비주류 문화가 주류를 이끈다’는 응답도 23.8%에 달했다. 특히 ‘서브컬처가 트렌드를 만든다’는 문항에 10대(46%), 20대(47%), 30대(44%) 모두 40% 이상의 공감도를 보였다. 플랫폼을 통해 서브컬처를 경험한 세대일수록, 이를 개인의 취향이 아닌 유행을 생산하는 문화로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서브컬처 콘텐트 소비 방식이 관람에서 참여로 이동했다고 본다. 대중 매체 중심의 일방향 유행과 달리, 젊은 세대는 취향을 직접 선택하고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데 익숙하다는 분석이다. 이 과정에서 서브컬처는 단발성 구매 대상이 아니라 굿즈·팝업스토어·가챠샵 방문으로 이어지는 ‘N차 소비’의 출발점이 됐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새로운 경험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 특성상 서브컬처 팬덤의 소비 화력은 구조적으로 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최근 일본식 ‘갸루’(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따라 하는 화장법) 메이크업이 Z세대를 중심으로 퍼진 것도 서브컬쳐 흐름에서 해석할 수 있다. 서브컬처가 단순한 소비를 넘어 자기표현의 언어로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서브컬처의 성장은 앞으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데이터호라이즌리서치는 서브컬처 시장 규모가 2033년 1284억 달러(약 189조 원)에 이를 것으로 내다봤다. 김 평론가는 “문화적 변화는 늘 변방에서 시작됐다”며 “이제는 SNS로 결집한 팬덤이 유행의 중심에서 시장의 판도를 직접 만들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