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보이’ 이상호(31·넥센)가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개막 직전에 열린 스노보드월드컵을 우승으로 장식하며 ‘주인공’ 대열에 합류했다.
이상호는 31일(한국시각) 슬로베니아 로글라에서 열린 국제스키연맹(FIS) 스노보드월드컵 알파인 남자 평행대회전 결승에서 46세 백전노장 롤란드 피슈날러(이탈리아)에 0.24초차로 앞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출발이 다소 늦었지만, 레이스 중반부에 피슈날러가 살짝 주춤하며 생긴 틈을 놓치지 않고 혼신의 역주로 격차를 따라잡았다. 결승선을 거의 동시에 통과한 두 선수의 순위는 비디오 판독을 거쳐 가려졌다. 손 끝이 살짝 앞서 승리했다는 결과를 확인한 이상호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포효했다.
이상호가 월드컵 무대에서 우승한 건 올 시즌 들어 처음이다. 꾸준히 8강 이내에 이름을 올렸지만, 줄곧 간발의 차로 포디움(메달권)과 인연을 맺지 못 했다. 하지만 지난달 25일 지몬회헤(오스트리아) 대회에서 4위에 오르며 첫 4강 등정을 신고한 데이어 바로 다음 대회에서 금메달까지 거머쥐며 동계올림픽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렸다.
월드컵 우승은 개인 통산 4번째다. 지난 2021년 12월 반노예(러시아) 대회에서 처음 정상에 오른 이후 2024년 1월 팜포로보(불가리아) 대회와 3월 빈터베르크(독일) 대회에 이어 2년 만에 다시 한 번 월드컵 무대를 태극기와 애국가로 수놓았다.
총 56명이 출전한 이번 대회에서 이상호는 예선에서 1분01초25를 기록해 피슈날러(1분01초01)에 이어 전체 2위로 16명이 일대일 승부를 펼치는 결선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최대 고비는 개최국 슬로베니아의 간판 팀 마스트나크와 맞붙은 4강전이었다. 2022년 베이징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이자 홈 어드밴티지를 등에 업은 상대인 만큼 접전이 예상됐지만, 최단코스로 과감하게 슬로프를 공략한 이상호가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어진 결승에서도 상승세를 살려 올림픽 7번째 도전을 앞둔 피슈날러를 제압했다.
이상호는 하계올림픽의 육상과 수영에 비견되는 동계올림픽의 ‘기초 종목’ 알파인에서 국내 선수 중 유일무이한 월드클래스다. 지난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어 대한민국 설상(雪上)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2022년 베이징대회에선 8강에서 2014 소치올림픽 2관왕 출신 빅 와일드(러시아)에 0.01초차로 패해 5위에 머물렀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국제대회에서 10위권 안쪽 성적을 유지하며 경쟁력을 입증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의 남자 주장으로 선정돼 ‘캡틴 코리아’로 나서는 건 설상 종목 강자로서의 존재감을 인정받은 결과다.
이상호는 30대를 부상과 함께 시작했다. 올림픽을 1년 앞둔 지난해 초 왼쪽 손목 골절로 한동안 슬로프에 오르지 못한 채 재활에 전념했다. 비록 몸 상태는 최상이 아니었지만, 부족한 부분을 훌쩍 성장한 멘털로 메꿨다. 이상호는 “어렸을 땐 조금만 다쳐도 조바심을 냈지만, 크고 작은 부상을 여러 차례 겪으며 ‘이 또한 지나가는 과정’이라 여기고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됐다”면서 “두 선수의 맞대결로 순위를 가리는 평행대회전은 기량만큼이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노련미가 중요하다. 40대 선수들을 흔히 볼 수 있는 종목인 만큼 길게 보며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 시즌 초반 포디움과 인연을 맺지 못한 것 또한 길게 보며 올림픽을 준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스노보드대표팀 관계자는 “올림픽 코스인 이탈리아 리비뇨의 스노파크 슬로프를 정밀 분석해 최적의 장비 세팅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했다”면서 “이에 대한 우리 선수들의 적응도가 높아지면서 올림픽을 앞두고 순위가 오르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팀 맏형 김상겸(37·하이원)도 예선을 3위로 마친 데이어 결선에서도 5위에 오르며 시즌 최고 성적을 냈다.
동계올림픽 알파인 스노보드 평행대회전은 대회 초반인 오는 8일에 열린다. 당일에 예선과 결선을 모두 치르는데, 이상호에게서 이번 대회 대한민국 선수단 첫 메달을 기대하고 있다. 대회 직전에 치른 마지막 월드컵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최상의 컨디션을 입증한 ‘캡틴 코리아’가 더욱 주목 받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