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로 보수 진영 이혜훈 전 의원을 지명했을 때 정치권 안팎에서 소환된 사람이 있다. ‘햇볕정책’을 내세웠던 김대중 정부가 첫 통일부 장관으로 선택했던 강인덕(93)이다.
강인덕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강경한 북한 전문가, 그것도 중앙정보부(중정) 출신 정보맨이었다. 대북 포용 정책을 추진하던 김대중 정부가 정반대의 인물을 기용하자 정치권은 큰 충격에 휩싸였었다.
파격의 중심에 섰던 남자는 아흔셋이 되어서야 비로소 입을 뗐다. 평생을 혹독한 중앙정보부 생활을 했던 그조차도 견디기 힘들었던 지독하게 외로웠던 당시의 시간에 대해 말이다.
스트레스는 무서웠다. 학도병에 이어 해병대 장교까지 지낸 건강한 그였지만 2000년 5월 대장암에 걸렸다. 수술을 마치고 온몸에 호스를 꽂은 채 마주한 텔레비전에는 역설적이게도 6·15 남북공동선언이 환호 속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 우려하던 일이 벌어진 거죠. 태생적으로 나와 맞지 않는 정부였어요. 그 안에서 결국은 내 얘기를 해야 하니까 갈등이 생길 수밖에요. "
장관직을 내려놓은 뒤 그는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미국의 비영리 언론인 자유아시아방송(RFA)에서 20년 넘게 북한 관련 방송을 했다. 지난해까지 매주 ‘노동당 간부들에게’를 진행하며 노동신문의 문장 하나, 형용사 하나까지 짚으며 비판과 개혁의 메시지를 던졌다.
〈100세의 행복2〉 9화는 강인덕이 대장암을 이긴 비결은 물론, 아흔이 넘어서도 전성기의 뇌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을 담았다. 평생 적의 그림자를 추적하며 살아온 노병이 말하는 ‘가장 무서운 적’은 세월도, 질병도 아니었다.
북한 핵 개발 막을 수 있었다… 통탄의 고백
강인덕은 중앙정보부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유난히 신임을 받았던 정보맨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를 곁에 두고 수시로 북의 동향을 확인했다. “강 동무, 저쪽 애들 요즘 무슨 생각하나?”
그렇게 권력의 심장부에서 활약했던 그에게도 평생 씹어 삼키지 못한 장면 하나가 있다.
아무도 질책하지 않았고, 누구도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스스로는 끝내 지우지 못한 기억이다.
" 그때 눈치챘어야 했어요. 북한의 핵 개발, 우리가 막을 기회가 분명히 있었거든요. "
강인덕이 북한의 핵 개발을 처음 의심한 건 1976년이다. 북한의 핵 문제가 국제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1993년보다 무려 20년도 더 전이었다.
당시 김일성은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면 어쩔 수 없다. 이걸 막으려면 우리가 핵을 만들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거의 없었다. 모두가 ‘설마’라는 달콤한 방심에 취해 있을 때, 강인덕의 시선은 단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비날론 섬유를 발명한 천재 석학이자, 일본 교토대 출신의 세계적 화학자 고(故) 이승기 박사. 6·25 전쟁 중 월북해 북한 원자력연구소 위원장을 맡고 있던 그의 움직임에서 강인덕은 ‘불길한 전조’를 읽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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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움직인 ‘파란 밑줄’
지금도 회자되는 강인덕의 전설이 있다. 그 전설은 1968년 1·21 사태에서 시작된다. 그의 예감은 1년을 앞서 있었다. 계속되는 북한의 무력 도발을 보며 남들이 보지 못한 이상한 결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1967년 1월 체포된 이른바 ‘똘마니 간첩단’ 사건은 그를 강하게 붙들었다. 북한이 뚜렷한 임무도 없이, 혹한의 한겨울에 휴전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북의 행보는 평소와 달리 너무 성급했고 무모했다.
강인덕은 이를 단순한 침투가 아닌 북한의 ‘동계작전’ 신호로 해석했다.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내년 초, 대규모 게릴라 침투 가능성이 큽니다. 인민전쟁이 시작됐다는 전제로 대비해야 합니다.” 보고서 속 ‘인민전쟁’ 네 글자에 파란색 밑줄까지 그었다.
박정희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인터폰을 들어 비서실장에게 지시했다.
“국방장관하고 군 참모총장 전부 들어오라 해.”
그리고 옆에 서 있던 강인덕을 향해 짧게 말했다.
“강 과장, 수고했네. 이제부터는 게릴라전이야.”
그 순간 강인덕의 등골이 굳었다. ‘만약 내 예측이 틀렸다면…’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됐다.
결국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이듬해 1월 20일 새벽, 북한 무장공비가 파주 문산을 넘어왔다. 다음 날 청와대 인근 자하문 고개에서 총성이 울렸다. 역사는 이를 ‘1·21 김신조 사건’으로 기록했다.
강인덕은 공로를 인정받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그날을 단순한 성취로만 기억하지 않았다. ‘서울 침투는 예측했지만 청와대 기습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동 속도와 거리까지 제시했더라면 대응이 더 빨랐을 텐데….’
나이 들면서 새삼 느끼는 게 있다. 진실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수정된다는 사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과거를 펼쳐 놓고 다시 읽는다. ‘내가 무엇을 맞혔는가’보다 ‘무엇을 놓쳤는가’를 묻는다. 고통스러운 복기(復棋)가 아니다. 질문이 이어지는 한, 그는 늙지 않는다.
대장암 극복 비결…마법 수프의 정체
몸을 대하는 태도도 비슷하다. 몸에서 나타나는 이상을 두려움이나 운명으로 넘기지 않는다. 이상 신호를 하나의 정보로 받아들이고, 무엇이 잘못됐는지 냉철하게 확인했다.
대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항암 치료를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평생 품어온 한 문장이 있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
그에게 ‘진리’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회피하지 않는 태도였다. 그는 “모든 일의 첫 번째는 진실을 마주하는 것”이라며 “무섭거나 귀찮다는 이유로 이를 외면하면 고칠 기회를 영영 잃게 된다”고 말했다.
건강을 위해 특별히 지켜온 것은 단 하나. 아침마다 아내와 함께 먹는 ‘야채수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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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뇌건강의 비밀은 박정희 전 대통령?
인터뷰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강인덕 전 장관의 놀라운 기억력이었습니다. 오래전 일을 년도는 물론 70년대 북한 경제 규모까지 또렷하게 기억했습니다. 스스로도 “체감 나이가 한창 일본으로 강의를 나가던 70대 정도로 느껴진다”고 할 정도입니다.
기억력의 비결을 묻자 박정희 전 대통령 덕분이라는 의외의 답변이 나왔는데요. “16년간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한 정보분석관 시절에 형성된 사고방식이 지독한 패턴이 돼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도대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얼마나 지독할 정도로 완벽을 요구했길래, 93세 정보원의 뇌를 지금까지 깨어있게 하는 걸까요?
100세 가까이 산 파워에이저들의 삶을 깊숙이 따라가다 보면, 개인의 인생사 마디마디에 선명하게 새겨진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결정적 장면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100세의 행복〉에서 역사책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은밀하고도 생생한 기록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