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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시시각각] 유스티티아는 광장을 보지 않는다

중앙일보

2026.02.01 07:20 2026.02.01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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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브이 제로(V0)에 양탄자를 깔아준 해괴한 판결이다.” 김건희씨의 1심 재판에서 징역 1년8개월이라는 ‘가벼운’ 선고 결과가 나오자 여권이 격앙했다. 징역 15년 구형의 9분의 1에 불과한 형량이 대중의 정의감에 어긋난다는 반응이다. 급기야 ‘봐주기 판결’이라며 사법부 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까지 터져나온다.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판사 입장에서 사형 구형까지 받을 정도로 몰락한 전 정권 수장의 배우자를 굳이 ‘봐줄’ 이유가 무엇인가. 오히려 사법부로서는 거센 비난과 정치적 공세를 피하기 위해 중형을 선고하는 편이 훨씬 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예상보다 낮은 김건희 1심 형량
여론보다 증거주의 고민한 흔적
특검, 여론전 대신 입증에 힘써야

재판부는 법 논리와 증거라는 원칙, 그리고 사회적 요구를 어느 정도 반영해야 한다는 또 다른 압박 사이에서 고심한 흔적을 숨기지 않았다. 비록 형량은 예상보다 낮았지만,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로 매섭게 피고인을 질책했다. 법리적 한계로 중형을 선고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그 도덕적 책임만큼은 분명히 하겠다는 메시지로 읽힌다. 결국 법관은 여론의 박수가 아니라 법전의 자구와 확립된 판례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판결은 특검이 설정한 무리한 기소 프레임과 사법적 형평성 원칙이 충돌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아무리 죄가 미워도 법률에 명시된 근거에 의해서만 처벌해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의 엄중함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결국 특검의 허술한 논고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특검이 주가조작 의혹에 대해 끝까지 ‘공동정범’ 혐의를 고집한 것은 전략적 패착에 가까웠다. 공동정범은 주범과의 긴밀한 공모 관계와 역할 분담이 엄격히 입증돼야 한다. 이미 앞선 도이치모터스 재판에서 다른 전주(錢主)들이 공동정범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고, 방조 혐의를 추가한 뒤에야 유죄 판단을 받았던 선례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특검은 정치적 명분에 매몰돼 입증이 까다로운 카드만을 고집했다. 법원이 검사가 기소하지도 않은 방조 혐의로 처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검의 무리수가 결국 중형 선고의 길을 스스로 차단한 셈이다.

여권의 반응은 자기모순적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그간 자신의 사법 리스크를 방어하며 ‘증거주의’를 강조하고 ‘정치 검찰의 무리한 기소’를 비판해 왔다. 확정되지 않은 혐의로 피고인을 낙인찍지 말라며 ‘무죄 추정의 원칙’을 내세우던 이들이 김 여사 판결 앞에서는 법리가 아니라 감정을 앞세워 사법부를 몰아붙인다. 내가 당할 때는 ‘사법 살인’이고, 상대가 벌을 받을 때는 ‘정서법’이 우선이라는 태도야말로 법치주의를 허무는 지름길이다.

우리 대법원 대법정 출입문 위에 있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 상(像)은 서구의 일반적 모습과는 다르다. 안대를 쓰는 대신 눈을 뜬 채 법전을 안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본다는 것이 결코 ‘광장의 함성’에 눈높이를 맞추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의의 눈은 여론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법전의 문구와 증거의 실체만을 응시할 때 비로소 권위를 얻는다.

1심 재판부는 광장에서 눈을 돌려 증거의 빈틈을 살폈다. 물론 이 판결이 국민 법 감정에 충분히 부합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1심의 판단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도 없다. 상급심에서 다시 다퉈야 한다. 하지만 재판은 국민의 박수를 위한 이벤트가 아니며, 감정의 배설구는 더더욱 아님을 1심은 보여줬다. 특검은 항소를 결정하며 장문의 설명자료로 재판부를 공개 비판했다. 특검은 여론전을 택하기보다 먼저 증거주의의 벽을 어떻게 넘을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서초동의 유스티티아는 안대를 벗고 있다. 그 눈은 광장의 촛불이나 깃발을 헤아리기 위함이 아니다. 증거가 가리키는 실체적 진실을 응시하고, 법전의 자구를 살피기 위함이다. 정의의 여신이 광장을 돌아보는 순간, 법치는 길을 잃는다.





이현상([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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