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그래미 어워즈 투표인단 겸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지 햇수로 10년 차다. 내가 처음으로 위촉된 2017년은 아델이 그래미 본상 4개 부문 중 신인상을 제외한 3개(올해의 앨범ㆍ레코드ㆍ노래) 부문을 석권한 해다. 유력한 경쟁자였던 비욘세가 홀대 받았다는 여론 때문에 ‘하얀 그래미(White Grammys)’라는 비판이 나왔다. 주최 측인 미국레코딩예술과학아카데미(NARAS)는 투표인단과 심사위원에 유색 인종 비율을 높이고 20~30대 젊은 청년층 음반관계자들을 적극적으로 충원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후 몇 개월 만에 내가 위촉됐다. 인종 차별 논란 속에서 뜻밖의 수혜를 입게 된 셈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래미 어워즈는 이런 논란에 여러차례 휩싸였다. 2021년엔 에티오피아 이민자 가정 출신의 천재 뮤지션이자 제2의 마이클 잭슨으로 꼽히는 위켄드가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위켄드는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그래미는 부패했고 나와 팬들, 그리고 음악 산업에 투명성을 빚지고 있다”며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했다. 비욘세를 필두로 저스틴 비버, 칸예 웨스트, 드레이크, 제인 말리크, 니키 미나즈, 위즈 칼리파, 테야나 테일러, 피오나 애플 등의 쟁쟁한 아티스트들이 시상식 불참 혹은 보이콧을 표명했다. 그해 그래미상 시상식은 역사상 가장 낮은 최저 시청률을 기록했고 높았던 위상까지 급속도로 추락했다.
이후 NARAS 측은 파격적인 쇄신안을 내놨다. 비밀리에 익명으로 운영해오던 15∼30명 규모의 후보선정위원회’ 즉, ‘비밀 위원회’ 제도를 아예 폐지했다. 대신 1만2000여 명의 전체 투표인단과 심사위원 모두가 1차 후보 지명 선정부터 직접 투표해 후보를 지명하는 제도를 도입했다. 더불어 2700여명의 새로운 전문가, 음악 제작자들을 신입 회원으로 위촉했다. 기존 백인 및 고령자 위주의 보수적 투표인단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하며 공정성과 투명성을 담보하겠다고 공식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2024년에도 주요 부문 상을 테일러 스위프트, 빌리 아일리시, 마일리 사이러스 등과 백인 여성 가수들이 받으며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K팝도 그동안 철저하게 외면당해왔다. K팝은 단기간 내 미국 메인 스트림과 전 세계 대중음악계를 빠르게 점령하며 대중성과 음악성, 더 나아가 폭발적인 음반 판매량과 콘서트 투어 티켓 판매량 및 각종 굿즈 등으로 인한 경제적ㆍ산업적 성과를 냈다. 하지만 2021~2023년 제63회 시상식에서 한국 대중가수 최초로 ‘최우수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후보에 올랐던 ‘K팝의 선구자’ 방탄소년단(BTS)도 수상엔 실패했다. 미국 빌보드 차트, 영국 오피셜 차트, 일본 오리콘 차트에서의 대기록들에도 불구하고 그래미는 견고한 ‘보수성’을 끝내 놓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만났던 여러 미국 대중음악 관계자들이 BTS의 수상이 3년 연속 불발된 것과 관련해 자신의 일처럼 분노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어떤 관계자는 비교적 수상이 쉬운 편에 속하는 뮤직비디오 부문에서조차 K팝 뮤지션들이 아무도 수상하지 못했단 사실에, 도대체 그래미가 왜 그런 어깃장을 부리는지 궁금해하는 듯했다. 미주 지역 아티스트들은 K팝 아티스트들처럼 뮤직비디오에 큰 제작비를 투여하지 못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로제의 ‘아파트’, 헌트릭스의 ‘골든’ 등이 본상 후보로 오른 올해에 이르러서야 그래미가 K팝을 본격적으로 인정하게 된 듯하다. 그래미는 1차 투표를 통해 출품된 수많은 작품 중에서 후보를 결정하며 이후 2차(최종) 투표로 수상작을 정하는데, 올해는 1차 투표 때부터 변화가 감지됐다.
예년보다 많은 K팝 그룹들이 1차 투표 때 지원서를 냈다. 또 K팝 뮤지션들이 연관돼있는 미국의 주요 음반사, 중소 레이블들도 ‘그래미 캠페인’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캠페인은 일종의 홍보를 말한다. 이들은 1만명이 넘는 전 세계 그래미 투표인단에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리스닝 파티’ ‘음악감상회’ 등 크고 작은 이벤트를 진행했다.
그 결과가 오늘의 그래미 시상식 결과로 나타났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주제가 ‘골든’이 ‘베스트 송 리튼 포 비주얼 미디어’ 부문에서 수상했다.
‘골든’과 ‘아파트’, 캣츠아이가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신인상’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등을 수상하진 못했지만, 그래미 어워즈 본상 후보에 올랐다는 건 미국 전 세대 연령대와 백인은 물론 유색인종까지 아우르는 ‘국민 가요’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서 K팝을 알린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BTS의 다른 곡들과 그 위상의 의미가 다르다. 다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한국 국적의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서 K팝이 미국의 메인 스트림에서 더 오래도록, 더 탄탄히 장기 집권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