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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하얗다’ 비판받던 그래미, 이제야 K팝 인정

중앙일보

2026.02.02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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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주 팝페라테너, 그래미상 투표인단 겸 심사위원, 용산문화재단 이사장
미국 그래미 어워즈 투표인단 겸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지 햇수로 10년 차다. 내가 처음으로 위촉된 2017년은 아델이 그래미 본상 3개(올해의 앨범·레코드·노래) 부문을 석권한 해다. 유력한 경쟁자였던 비욘세가 홀대 받았다는 여론 때문에 ‘하얀 그래미(White Grammys)’라는 비판이 나왔다. 주최 측인 미국레코딩예술과학아카데미(NARAS)는 투표인단과 심사위원에 유색 인종 비율을 높이고 20~30대 젊은 청년층 음반관계자들을 적극적으로 충원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후 몇 개월 만에 내가 위촉됐다. 인종 차별 논란 속에서 뜻밖의 수혜를 입게 된 셈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래미 어워즈는 여러 차례 이런 논란에 휩싸였다. 2021년엔 에티오피아 이민자 가정 출신의 천재 뮤지션 위켄드가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르지 못하자 비욘세를 필두로 저스틴 비버, 칸예 웨스트 등 쟁쟁한 아티스트들이 시상식 보이콧을 표명했다. 2024년에도 주요 부문 상을 테일러 스위프트, 빌리 아일리시, 마일리 사이러스 등 백인 여성 가수들이 받으며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K팝도 그동안 철저하게 외면당해왔다. K팝은 단기간 내 전 세계 대중음악계를 빠르게 점령하며 폭발적인 음반 판매량과 투어 공연 및 각종 굿즈 등으로 인한 경제적·산업적 성과를 냈다. 하지만 방탄소년단(BTS)도 그래미 수상엔 실패했다. 미국 빌보드 차트, 영국 오피셜 차트 등에서의 대기록들에도 불구하고 그래미는 견고한 ‘보수성’을 끝내 놓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만났던 여러 미국 대중음악 관계자들이 BTS의 수상이 3년 연속 불발된 것과 관련해 자신의 일처럼 분노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친다.

로제의 ‘아파트’, 헌트릭스의 ‘골든’ 등이 본상 후보로 오른 올해에 이르러서야 그래미가 K팝을 본격적으로 인정하게 된 듯하다. 그래미는 1차 투표를 통해 출품된 수많은 작품 중에서 후보를 결정하며 이후 2차(최종) 투표로 수상작을 정하는데, 올해는 1차 투표 때부터 변화가 감지됐다.

예년보다 많은 K팝 그룹들이 1차 투표 때 지원서를 냈다. 또 K팝 뮤지션들이 연관돼있는 미국의 주요 음반사, 중소 레이블들도 ‘그래미 캠페인’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여기서 말하는 캠페인은 일종의 홍보를 말한다. 이들은 1만명이 넘는 전 세계 그래미 투표인단에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며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리스닝 파티’ ‘음악감상회’ 등 크고 작은 이벤트를 진행했다.

그 결과가 오늘의 그래미 시상식 결과로 나타났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주제가 ‘골든’이 ‘베스트 송 리튼 포 비주얼 미디어’ 부문에서 수상했다.

‘골든’과 ‘아파트’, 캣츠아이가 ‘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노래’ ‘신인상’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등을 수상하진 못했지만, 그래미 어워즈 본상 후보에 올랐다는 건 미국 전 세대 연령대와 인종을 아우르는 ‘국민 가요’ 반열에 올랐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서 K팝을 알린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나 BTS의 다른 곡들과 그 위상의 의미가 다르다. 다만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 한국 국적의 음악가 중 한 사람으로서 K팝이 미국의 메인 스트림에서 더 오래도록, 더 탄탄히 장기 집권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바란다.

임형주(팝페라테너, 그래미상 투표인단 겸 심사위원, 용산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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