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을 차려입은 두 선수가 서울 목동 아이스링크에서 카메라 앞에 섰다. 비단 자락의 매무새를 만져주며 환하게 웃는 이들의 대화는 영어와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한국어, 그리고 어렴풋한 프랑스어 엑센트가 뒤섞여 묘하지만 활기찬 리듬을 만들어냈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단체전 출전을 앞둔 아이스댄스 국가대표 권예(25)와 임해나(22)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변화하는 얼굴을 상징한다.
이들의 파트너십은 그 자체로 ‘글로벌 싱크로나이즈’의 산물이다. 토론토에서 자란 한국계 이민 2세 임해나는 서구적인 자유분방함 속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한국적 정서를 간직한 ‘이국적인 한국인’이다. 반면 중국계로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나 몬트리올에서 성장한 권예는 아시아적인 외모를 지녔지만, 사고방식과 언어는 철저히 서구에 뿌리를 둔 ‘아시아적 외모의 외국인’이었다.
2019년 7월 처음 만났을 당시, 두 사람은 외향적인 임해나와 내성적인 권예라는 성격 차이만큼이나 서로에게 낯선 존재였다. 하지만 아이스댄스라는 종목은 그 격차를 ‘조화’로 메우는 예술이다. 고난도 점프보다는 스텝과 턴, 리프트 등 두 사람의 섬세한 호흡을 중시하는 이 종목에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은 오히려 연기의 깊이를 더하는 자양분이 됐다. 임해나는 “어렸을 때부터 올림픽에 나가는 게 가장 큰 목표였는데, 함께 이 자리에 설 수 있어 행복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들의 조화는 국제 무대에서 이미 증명됐다. 2021-22시즌 주니어 그랑프리에서 한국 아이스댄스 사상 최초의 메달을 따냈고, 이듬해 아시아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권예는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니 연기도 좋아졌다”며 “훈련할 때는 보통 활달한 해나가 리드하고 내가 맞춰주는 편”이라며 웃어 보였다.
올림픽 무대를 향한 여정은 법적 장벽을 넘는 과정이기도 했다.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주관 대회는 한 명만 국적이 있어도 출전이 가능하지만, 올림픽은 두 선수의 국적이 같아야 한다. 이를 위해 권예는 2023년 자신의 뿌리인 ‘취안(全)’의 한국식 발음을 딴 ‘권(權)’씨 성을 택해 법무부 특별 귀화 과정을 밟았다. 1년 반 동안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공부한 그는 이제 애국가 4절을 완벽히 부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한국의 순댓국 맛을 그리워하는 ‘법적·정서적 한국인’으로 거듭났다.
이러한 국적의 이동은 이제 한국 스포츠계에서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과거에는 ‘국가주의’적 관점에서 귀화 선수에 대한 반감이 존재하기도 했으나, 이제 대중은 국적보다 선수가 추구하는 가치와 노력을 더 존중한다. 권예와 임해나 외에도 3회 연속 올림픽 무대를 밟는 러시아 출신 바이애슬론 선수 예카테리나 압바꾸모바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며, 반대로 한국인이었다가 다른 국적을 택해 빙판에 서는 사례도 흔해졌다. 쇼트트랙의 린샤오쥔(중국·한국명 임효준)과 문원준, 스피드스케이팅의 김민석(이상 헝가리) 등이 대표적이다. 선수들이 국경을 넘나드는 ‘코스모폴리탄적 이동’에 대해 팬들은 시대적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는 마치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가진 멤버들이 모여 시너지를 내며 세계 최고가 된 ‘블랙핑크’의 성공 공식과도 닮아 있다. 스포츠 대표팀 역시 혈통 중심의 단일성을 넘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인재들이 모여 ‘팀 코리아’라는 이름 아래 최상의 경쟁력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권예와 임해나는 이 흐름의 최전선에 서 있다.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까지 4개 국어를 구사하는 권예는 이제 콴예라는 이름 대신 ‘권예’로 빙판 위에 선다. 한국 팀답게 싸이, 로제, 화사 등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갈라 프로그램 곡으로 사용하며 전 세계에 ‘K-아이스댄스’의 현대적인 색채를 입히고 있다.
이들은 밀라노의 설원에서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연기를 준비하고 있다. “태극기를 가슴에 다는 것은 깊은 영광입니다.” 권예가 한국어로 말을 맺었다. “올림픽 정신은 우리가 어디서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위해 은반 위를 달리는가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