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너머로 낮게 깔린 짙은 안개와 밤하늘을 찌르는 조명 탓일까. 산시로 스타디움은 거대한 우주선이 이탈리아 밀라노의 대지 위에 내려앉은 듯한 초현실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축구가 곧 종교이자 삶인 이 도시에서 산시로는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다. 주세페 메아차와 파올로 말디니 같은 전설들이 숨 가쁘게 누볐고, 월드컵과 유로의 환희가 층층이 쌓인 ‘축구의 성지’다.
서울 잠실구장을 공유하는 LG와 두산처럼 AC밀란과 인터밀란이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지내지만, 이곳의 자존심은 더 서슬 퍼렇다. AC밀란의 홈일 때는 ‘산시로’, 인터밀란의 홈일 때는 ‘주세페 메아차’로 이름마저 바꿔 부르는 이 완고한 성소(聖所)가 이제 올림픽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산시로는 이탈리아어로 ‘라 스칼라 데 칼치오(La Scala del Calcio)’, 즉 ‘축구의 오페라 극장’이라 불린다. 롤링 스톤스부터 비욘세, 테일러 스위프트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의 팝스타들이 거쳐 간 이 화려한 무대에서 오는 7일(한국시간),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올림픽의 화려한 막이 오른다. 웅장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타고 흐르는 조명은 마치 마법 같은 밤을 예고하는 서막처럼 보였다.
1926년 개장해 올해로 정확히 100년의 세월을 견뎌온 산시로의 실루엣은 독보적이다. 수차례의 증축을 거치며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은 끊임없이 변모해온 밀라노의 역동성을 그대로 투영한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 개회식은 산시로가 전 세계 스포츠 팬들에게 선사하는 ‘라스트 댄스’이기도 하다. 두 연고 팀이 이곳을 허물고 새 구장을 짓기로 합의하면서, 산시로라는 이름으로 치르는 마지막 대형 이벤트가 됐기 때문이다.
경기티켓 75% 이미 팔려, 뜨거운 열기 100년 역사의 퇴장을 지켜보는 시민들의 마음은 복잡하다. 경기장 근처에서 만난 밀라노 시민 시아라 소피아 리스트로는 “역사적인 개회식을 보고 싶지만 티켓값이 너무 가혹하다. 꼭대기 끝자리가 260유로(약 45만 원)나 된다”며 발을 동동 굴렀다. 가장 좋은 좌석인 카테고리A는 2026유로(약 350만 원)에 달한다. 조직위는 7만6000석의 거대한 공간을 채우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에게 티켓값에서 ‘0’을 하나 뺀 26유로에 특별 판매를 하는 고육지책까지 썼다. 반면 경기 티켓은 전체의 4분의 3인 110만 장이 이미 팔려나가며 열기를 증명하고 있었다.
개막을 코앞에 둔 2일, 밀라노 말펜사 공항과 시내는 의외로 차분했다. 축제 전야의 폭발적인 에너지는 아직 수면 아래 잠겨 있는 듯했다. 그래도 도심 곳곳의 LED 광고판에는 ‘THIS ISN’T JUST A SHOW, IT‘S HISTORY(이건 단순한 쇼가 아니라 역사입니다)’라는 문구가 오륜기와 함께 명멸했다. 결국 이 축제는 밀라노라는 고도(古都)의 골목마다 스며들어 세대를 이어갈 살아있는 기억이 될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으로 유명한 두오모 대성당 앞에는 삼성전자의 거대한 옥외광고가 걸려, 밀라노의 고전적인 품격 위에 현대적인 올림픽의 색채를 덧입히고 있었다.
“여유로운 밀라노, 올림픽 덕에 빨라져”
연봉 총액 수천억 원에 달하는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스타들이 격돌할 산타줄리아 아이스하키 아레나 주변은 트랙터와 인부, 건축자재와 먼지로 어수선했다. 이 나라 특유의 여유로운 기질 탓일까. 이탈리아 출신 방송인 알베르토 몬디는 “지난해 11월에 끝났어야 할 공사들이 늦어졌다”면서도 “내가 유로스포츠와 함께했던 2018 평창 당시에도 개막 직전까지 우려가 많았지만 결국 성공하지 않았나. 이탈리아는 이미 두 번의 동계올림픽을 치러낸 노련한 노하우가 있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15년째 밀라노에 거주 중인 교민 임기호 씨는 “원래 여유로운 도시인데 올림픽 덕분에 밀라노가 빨라졌다. 평소 4년 걸릴 건축 공사가 1년 만에 끝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올림픽 기간 약 150만 명의 관광객이 몰려들 것으로 예상되면서 도시 전체가 들썩이고 있다. 숙박 요금은 평소의 2~3배인 50만~70만 원대로 치솟았고, 설상 종목이 열리는 리비뇨 지역은 하룻밤에 150만 원을 호가하는 곳도 속출하고 있다.
밀라노 중앙역에서 기차(프레치아로사)를 타고 베네치아를 거쳐 고속버스로 갈아타며 약 440㎞를 달려 도착한 또 다른 개최지, 코르티나담페초는 인구 6000명의 작은 산골 마을이지만, 대형 트럭과 공사 장비들의 소음이 정적을 깨우며 올림픽의 임박을 알리고 있었다. 관중들을 실어 나를 케이블카 공사가 한창이었고, 인부들은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철제 구조물을 조이며 막판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해발 1224m에 위치한 이곳은 70년 전인 1956년 올림픽이 열렸던 겨울 스포츠의 성지다. 당시 야외 스피드스케이팅이 열렸던 미수리나 호수 너머로는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는 돌로미티 산맥이 병풍처럼 마을을 감싸 안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암벽과 그 위를 덮은 하얀 만년설, 그리고 붉게 타오르는 노을이 섞인 장엄한 능선은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뽐내며 이곳이 왜 전 세계 부호들의 안식처가 되었는지를 설명했다. 100년 된 성당 종소리와 최신식 케이블카의 기계음이 뒤섞이는 이질적인 조화 속에 코르티나담페초는 다시 한번 전 세계를 맞이할 뜨거운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