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역폭메모리(HBM)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정호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가 10년 안에 ‘고대역폭플래시(HBF·High Bandwidth Flash)’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HBM이 속도를 담당하고, HBF가 용량을 맡는 ‘메모리 중심’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할 것이란 분석이다.
김 교수는 3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발표회에서 “HBM만으로는 AI 발전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더 큰 용량의 새로운 메모리가 필요하다”며 “2038년쯤 HBF 수요가 HBM을 넘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텍스트·이미지·영상·음성 등 다양한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모달 AI 확산으로 연산 수요가 급증하면서, HBM 용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한국 정부에 공급을 약속한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대를 운용하려면 HBM은 약 208만대가 필요하다.
HBM이 휘발성 메모리인 D램을 수직으로 쌓은 구조라면, HBF는 비휘발성 메모리인 낸드플래시를 적층한 방식이다. 속도는 HBM보다 느리지만 용량은 약 10배 크다. 김 교수는 두 기술을 각각 ‘책장’과 ‘도서관’에 비유했다. 그는 “시험을 볼 때 책장은 바로 옆에서 빠르게 꺼내 쓸 수 있고, 도서관은 훨씬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며 “HBF는 속도보다 대용량이 강점”이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HBF 시장 역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이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HBF는 적층 기술 측면에서 HBM 공정을 상당부분 활용할 수 있다. 미국 샌디스크나 일본 키옥시아 등 낸드플래시 전문 기업도 수혜를 입겠지만, HBM 생산과 패키징 역량을 동시에 갖춘 국내 기업과 비교하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특히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도 보유해 베이스 다이(base die·HBM의 아랫부분) 제작이 가능한 삼성전자의 잠재력이 크다고 평가했다.
다만 기술적 과제도 남아 있다. HBF는 낸드플래시 기반이기 때문에 쓰기 횟수에 제한이 있어 데이터 손실 가능성이 존재한다. 같은 종이에 글씨를 계속 쓰고 지우면 닳아 없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김 교수는 “쓰기 수명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HBF 상용화 시점을 2027년 말~2028년으로 예상했다. SK하이닉스는 내년 양산을 목표로 개발을 진행 중이며, 삼성전자도 내부적으로 HBF 독자 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샌디스크는 지난해 7월 HBF 기술 자문위원회를 꾸리고 경쟁에 가세했다. 김 교수는 “HBM에 이어 HBF에서도 한국 메모리 제조사가 주도권을 잡아야 AI 시장에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