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오후 서울 종로3가 귀금속도매상가에서 일하는 김현상(57)씨는 이틀 전 실버바를 사간 고객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지난달 30일 순도 99.9% 실버바 1㎏짜리 5개를 사기로 한 고객이 예약을 취소할 수 있는지 물었다. 당시 800만~820만원이던 실버바 시세가 주말 사이 680만~720만원까지 떨어진 탓이다. 김씨는 “지난주만 해도 실버바가 없어 여러 개 구입하는 손님 것은 바로 출고를 못 하고 공장에 주문을 넣었다”며 “은값이 폭락하니 취소할 수 있냐는 전화만 오늘 두 통째”라고 말했다.
이날 귀금속 거리엔 은 제품을 사려는 사람은 없고, 팔려는 발걸음만 이어졌다. 3년 전 결혼한 아들 부부와 온 이복희(62)씨는 “그때 준 금 10돈, 은 1㎏을 팔고 싶대서 같이 왔는데 며칠 새 시세가 100만원 넘게 차이 나니 아쉽다”고 말했다.
“사려는 사람 없고, 팔려는 발걸음만” 은 가격이 단기간 급등락하며 시장이 ‘실버 패닉’에 빠졌다. 뉴욕상품거래소(COMEX)에 따르면 3일(현지시간) 오전 2시 기준 은 선물은 온스당 83.05달러에 거래됐다. 지난달 26일 온스당 115.5달러(약 16만7521원)를 돌파하며 역대 최고가를 경신한 은값은, 지난달 30일 하루 사이 31.37% 가까이 추락하며 78.53달러까지 밀렸다. 같은 날 은뿐 아니라 금(4월 인도분 선물) 가격도 11.4% 하락해 4745.1달러가 됐다. 이날 마켓워치는 “금·은 시장에서 시가총액 7조4000억 달러(약 1경721조8600억원)가 증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고공 행진하던 은값이 고꾸라진 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차기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으로 케빈 워시를 지명하면서다.
이후 투매 행렬이 잦아들면 다시 가격이 반등하고 있지만 예전 기세는 회복하지 못했다. 워시 후보는 지명 전 거론되던 다른 Fed 후보보다 ‘매파’(통화 긴축 선호) 성향으로 분류된다. 이자가 붙지 않는 실물자산인 은은 금리가 상승할수록 보유에 따른 기회비용이 커지기 때문에 투자 매력이 떨어진다.
은 가격이 다른 자산보다 큰 폭으로 널뛰는 건, 2020년대 변곡점을 맞은 수급 구조 탓도 크다. 2010년대 중후반까지 세계 은 시장에선 공급이 수요를 소폭 앞섰지만, 최근 태양광·인공지능(AI)·5G·전기차 등 신산업 수요가 폭발하며 본격적인 ‘구조적 부족’ 단계에 진입했다는 진단이 나온다. 열·전기 전도성이 뛰어나고 내구성이 강한 특성 덕분에 은은 필수 산업재로 떠올랐다. 실제 지난해 전체 은 수요 중 산업용 비중은 59%로, 실물 투자(17.8%)나 장신구(17.1%) 수요를 합친 것보다 높았다.
은 전문기관 실버 인스티튜트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세계 연간 은 총수요는 약 11.48억 온스(3만5707t)에 달한다. 반면 공급량은 재활용분을 합쳐도 약 10억 온스(3만1103t) 수준에 정체돼 있다. 지난해 실버 인스티튜트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은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멕시코(24%), 페루(14%), 중국(13%) 등 상위 3개국이 사실상 과점하고 있다. 여기에 은은 화학적 안정성이 낮아 부식과 변질에 취약하다. 산업용으로 활용한 은은 재활용도 쉽지 않다.
시장이 요동치는 지금 은을 팔아야 할까, 아니면 매수 기회로 삼아야 할까. 전문가들 의견은 ‘단기 혼조, 장기 강세’로 요약된다. 서상영 미래에셋증권 연구원은 “최근 금·은 가격은 중국발 투기 자본과 추세 추종형(CTA) 펀드, 개인 상장지수펀드(ETF) 투자자 등 영향으로 유례없는 변동성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JP모건체이스도 최근 보고서에서 “은이 당분간 지지선을 찾을 수 있을지 지켜봐야 한다. 결론은 거래가 지나치게 과열됐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장기 관점에서는 낙관론이 나온다. 옥지회 삼성증권 연구원은 “은은 아연·동 대련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생산량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고, 주요 수출국인 중국이 지난 달 은 수출 통제를 강화하는 등 지정학적 리스크도 공급량을 제한한다”며 “이에 비해 은 수요는 매년 확대되는 추세”라고 짚었다.
은은 ‘악마의 금속’… “분할 매수 하라” 금 대비 은의 상대적 가치를 나타내는 ‘금은비(Gold-Silver Ratio)’를 주목하라는 조언도 있다. 이날 기준 금 가격은 은 대비 57.34배로, 역사적 평균치인 59.46을 뚫고 내려왔다. 보통 시장에선 80배 이상일 경우, 은이 저평가됐다는 뜻으로 읽는다. 지난해 100배에 육박했던 것과 비교하면, 현재 은이 상대적으로 고평가되고 있단 신호다. 다만 2011년 금은비(약 32배)와 비교하면 여력이 있단 분석도 있다. 최근 씨티그룹은 “금·은 가격 비율이 2011년 수준까지 내려가면 은 값은 온스당 170달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은이 ‘악마의 금속’이라 불릴 만큼 변동성이 극심하니 ‘분할 매수’ 방식으로 접근할 것을 권고한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은 시장 규모는 금 등 다른 자산에 비하면 아주 적어 변동성이 클 수밖에 없다”며 “국제 정세 등 영향을 받는 만큼 투기 목적의 수요인 경우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