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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의 타임머신] 얄타 회담

중앙일보

2026.02.03 07:06 2026.02.03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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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1945년 2월 4일, 2차 세계대전의 끝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흑해 연안 휴양 도시 얄타에 미국·영국·소련의 지도자들이 모여들었다.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영국의 윈스턴 처칠,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한 자리에서 나치 독일의 전후 처리와 제반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일주일간 정상회담을 갖기로 한 것이다. 얄타 회담(사진)의 시작이었다.

독일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미국·영국·프랑스·소련에 의해 분할통치될 예정이었다. 연합국은 독일인의 최저생계를 마련해주되 그 외는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기로 했다. 독일의 군수산업은 폐쇄·몰수될 것이며, 주요 전범들은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 재판에 회부될 터였다. 분단되고 무장 해제된 독일에는 연합군, 특히 미군이 주둔하여 소련과 대치하게 되었다.

극동 지역에서의 문제를 두고 비밀의정서가 채택되었다. 독일이 항복하면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깨고 ‘2, 3개월 이내’에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했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의 관동군을 직접 상대하기 싫었던 미국이 이이제이를 꾀한 것이다. 이 판단은 큰 실책으로 드러났다. 소련이 참전한 지 5일 만에 일본이 항복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빠른 속도로 한반도로 쏟아져 들어와 북위 38도선까지 도달했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뿐 아니라 전쟁에 휘말렸을 뿐인 식민지 조선마저 분단되고 만 것이다.

얄타 회담은 2차 세계대전의 끝과 전후 질서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냉전의 철조망은 유럽에서 독일을 동서로 갈랐고, 아시아에서 한반도를 남북으로 나누었다.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공하면서 냉전은 결코 ‘차가운’ 전쟁일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은 이미 공산권에 맞서기 위해 전범국이었던 독일과 일본의 경제 부흥을 돕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80년간 익숙하게 여겨온 세계 질서는 이렇게 시작됐다. 그 질서의 끝이 보이는 듯한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냉철하고 현명해질 필요가 있다.

노정태 작가·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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