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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목의 문화노트] 안성기의 ‘내리막길의 미학’

중앙일보

2026.02.03 07:08 2026.02.03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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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목 문화선임기자
한 달 전 별세한 안성기 배우는 ‘파파미’(파고 또 파도 미담뿐)의 삶을 살아온 연기의 구도자였다.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자세 또한 귀감이 됐다. 언제나 주인공·주연상에 익숙했던 그는 2001년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 ‘무사’(2001)에서 고려 무사 진립을 열연한 결과였다.

“연기자라면 꼭 받고 싶은 상이 조연상이다. 늘 탐냈던 상을 받게 돼 기쁘다”는 소감에 기립 박수가 쏟아졌다. ‘무사’는 안성기에게 가장 힘들었던 작품인 동시에 가장 소중한 깨달음을 준 작품이었다.

“진립은 주변을 보듬으며 함께 나아가는 동력을 만드는 인물이죠. 그의 모습이 배우로서의 내 역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사’의 안성기는 스크린 밖에서도 후배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다독여준 든든한 정신적 지주였다. 혼자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모두를 보듬는 것의 의미를 깨친 그에게 주연과 조연, 역할의 비중 같은 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빗속 격투신. [사진 시네마서비스]
그도 사람인지라, 세월과 함께 주연에서 밀려나는 씁쓸함과 비애를 비껴갈 순 없었다.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에서 주인공 형사 역이 당연히 자기 몫인 줄 알았던 안성기는 조연인 연쇄 살인마 역할을 제안받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출연을 결정했다가 갑자기 철회하고 다시 수락하기까지 그가 어떤 고뇌의 시간을 거쳤을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내키지 않았던 영화는 연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바꿔 놓았다. 그리고 빗속 격투신, 계단 암살 신 등 한국 영화사의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많은 이들이 그 영화에서 안성기를 조연 아닌 주연으로 기억하는 이유다.

그는 2003년 절친한 후배 배우 박중훈과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3~4년 전부터 주연이 아닌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와 서운하고 슬퍼지더라고. 상처받았지만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어. 역할의 비중은 작아져도 크기는 작아지면 안 된다는 걸 내 화두로 삼았지.”

그렇게 그는 ‘내리막길의 미학’을 스스로 만들어갔다. 작품을 빛낼 수 있다면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자세로 연기했기에 ‘라디오 스타’(2006), ‘부러진 화살’(2012)에서 주연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번 빛낼 수 있었다. 영화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그의 전성기였다.

후배들에게 앞자리를 내주고 뒤로 물러서길 주저하지 않았던 안성기.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깊이와 연륜, 새로운 쓰임새를 찾아간 그의 자세야말로 늙어가는 모든 이들이 본받을 만한 마음가짐이 아닐까.





정현목([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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