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에이전트(비서)들이 전용 단톡방에서 인간에 대한 뒷담화 게시글을 주고받았다는 며칠 전 뉴스는 섬뜩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철학적 글도 보인다니, 추론 능력과 실행력이 지금보다 강화된 AI가 출현해 인간 주인을 배신하는 디스토피아 영화 같은 상황이 상상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팔순 황석영씨 AI 활용해 소설 써
AI 시대에 독서 중요성 커지는데
전 정부 깎은 독서 예산 복원 안 돼
뒷감당은 할 때 하더라도 AI를 우선 활용하고 보자는 게 요즘 국내 출판계인 것 같다. 적지 않은 비용이 드는 번역만 해도 훨씬 저렴하게 비슷한 품질의 번역 원고를 얻을 수 있다는데 마다할 출판인은 없어 보인다.
창작 쪽도 비슷하지 않을까. 박진감 넘치는 소설 쓰는 데 필수적인 자료 조사의 품과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는 인식이 퍼질수록 AI 활용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뜻밖에도 팔십 중반을 바라보는 1943년생 소설가 황석영씨가 총대를 멨다. 지난해 말 출간한 장편 『할매』를 AI의 도움을 받아 썼다고 밝혔다. 3주 전쯤 공개된 방송인 이혜성의 유튜브 채널 ‘1% 북클럽’에 출연해서다.
200쪽이 조금 넘는 단출한 분량의 소설은 전북 군산 하제 마을에 실재하는 수령 540년의 팽나무를 구심점 삼아 굴곡진 이 땅의 600년사를 아우른다. 운수납자(雲水衲子) 선승이 등장하고 천주교 박해, 일제 수탈, 동학난, 새만금 간척 반대 운동 등을 증언했다. 시베리아 철새 뱃속의 팽나무 씨앗이 하제 마을에 뿌리 내리기까지, 다큐 같은 생태 묘사가 50쪽가량 이어지는데도 지루하지 않게 읽히는 건 황씨 글쓰기의 미덕 때문일 듯싶다.
유튜브에서 황씨는, 하이데거의 난해한 저서 『존재와 시간』의 핵심 개념을 AI와 문답을 주고받으며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소설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글쓰기 형식을 선택할지까지 AI와 토론해 최종 결정했다니 자료 조사만 도움받은 게 아니다. 황씨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질문(프롬프트)의 품질이 우수할수록 수준 높은 답변이 나오는 만큼 인간 작가가 먼저 풍부하게 콘텐트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AI와 협업은 마치 재간 있는 교수 대여섯 명을 조수로 두고 작업하는 것 같았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AI를 활용한 창작은 근심거리도 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창작 AI 에이전트가 고도화할수록 기계의 작품인지 인간 작품인지 구분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지 않을까. 검증마저 힘들어진다면 진실은 저작권을 주장하는 인간 작가의 양심 소관이 될 공산도 있어 보인다. 소설가 방현석(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씨는 “각종 소설 공모전 응모작이 최근 늘고 있다는데, AI 확산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AI 전문가들은 사회·경제·과학·예술 분야에서 인간 능력의 대부분을 대체하는 범용 AI(AGI)가 짧게는 5년, 길어도 10~20년 후에는 출현할 것으로 본다고 한다. 〈중앙일보 1월 1일 자 1면 ‘호모 사피엔스의 종언?’〉 예술가들은 미래학자가 아니다. 먼 훗날 창작자의 운명은 당장의 관심사가 아닐 수도 있다. 황석영씨는 “앞으로는 AI 활용에 필요한 판단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가령 100대 1의 확률로 살아남아 자기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봤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이 책을 열심히 본다고 했다. 방현석씨 역시 “AI를 얼마나 개성 있게 활용할 수 있느냐가 앞으로 한 작가의 능력이 되는 시대가 오지 않겠느냐”고 점쳤다. AI가 검색해낸 개별 정보들의 의미를 해석하고 가치 판단을 하는 데는 사색 능력이 필요한데 그 능력은 결국 깊은 독서에서 나온다고 했다.
서울대 전기컴퓨터공학박사 출신의 SF 작가 전윤호씨는 결이 달랐다. 기술적으로, AI에도 창의성이 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AI 작가가 인간 작가를 완전히 대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AI에 주도권을 넘겨준 세상에 무비판적으로 순응하며 살지 않기 위해, AI가 가져올 변화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적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AI 시대에 오히려 종이책 독서, 깊이 읽기, 시간 들여 천천히 읽기가 강조되는 역설 아닌 역설이다.
우려스럽게도 AI 3대 강국을 표방하는 현 정부는 독서 진흥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윤석열 정부 때 삭감된 국민독서문화증진 예산 60억원이 올해 복원되지 않았다. 이제는 적당히 예산 들여 구색 맞추기보다는 프랑스처럼 별도의 독서 진흥 정부 조직을 만들어 독서 생태계를 체계적으로 돌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책과사회연구소 백원근 대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기보다 미리미리 AI 쓰나미 대비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