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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기다려" 황대헌 저격했던 린샤오쥔…'악연 레이스' 펼쳐진다

중앙일보

2026.02.03 12:00 2026.02.0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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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평창에서 함께 태극마크를 달았던 황대헌(왼쪽)과 린샤오쥔. 이후 악연으로 얽혔던 둘은 이제 밀라노에서 다른 유니폼을 입고 정면 대결한다. [뉴스1]

3일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 한국 쇼트트랙 국가대표 황대헌(27)이 링크 주위를 돌며 컨디션을 점검했다. 그가 스케이트 날을 닦으며 빙판을 빠져나온 지 2시간 쯤 뒤, 붉은 유니폼을 입은 린샤오쥔(30·한국명 임효준)이 중국 선수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전날에 이어 이날도 두 선수의 동선은 정교하게 엇갈렸다.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혹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레나를 감도는 공기는 이미 8년 전 평창에서 시작된 ‘기구한 악연’의 재회를 예고하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3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황대헌이 대표팀 동료들과 훈련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20260203

두 선수의 비극은 2019년 6월 17일, 진천선수촌 웨이트장에서 시작됐다. 공식 훈련 전 대기 시간, 남녀 선수 10여 명이 섞여 장난을 주고받던 평범한 일상이 한순간에 파국으로 변했다. 황대헌이 한 여자 선수의 엉덩이를 주먹으로 쳤고, 해당 선수는 과장된 반응을 보이며 웃어 넘겼다. 이어 황대헌이 암벽 기구에 오르자 임효준이 뒤에서 그의 반바지를 잡아당겼다. 찰나의 순간 황대헌의 엉덩이 일부가 노출됐고, 임효준은 놀리듯 도망쳤다.

하지만 이 ‘가벼운 장난’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황대헌이 수치심을 느꼈다며 신고했고, ‘동성 간 성추행’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졌다. 때마침 조재범 사건이 이슈가 되면서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반응이 극도로 예민해 있던 상황이었다. 평소 훈련장에서 스스럼없이 장난을 치던 동료 사이였음에도, 사법부의 최종 판단이 나오기 전 여론의 법정이 먼저 단죄를 시작했다.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임효준의 이름 앞에는 ‘성추행범’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중국으로 귀화한 린샤오쥔. 신화=연합뉴스
임효준 징계, 빙상팀 악재 맞물려 더 세져
그러나 ‘시기적 불운’이 다가 아니었다. 쇼트트랙은 특별한 종목이다. 김정효 서울대 연구교수는 “동계올림픽은 예외적 개인, 다시 말해 천재적인 선수의 경이적인 활약에 의존했다. 김연아가 그랬고, 이상화가 그랬다. 쇼트트랙은 압도적 개인이 탄생하기 어려운 구조다. 워낙 좁은 선수 풀이어서 초등학교 때부터 경쟁하던 친구는 국가대표 팀 선발 때까지 만나게 된다. 때로는 매우 끈끈한 팀 정신으로 발현되기도 하나, 한 개인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동거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빙상연맹에선 수많은 잡음이 터졌다. 게다가 쇼트트랙은 스케이트의 칼날처럼 간발의 차이로 순위가 결정되는 극도의 긴장감과 코너를 둘러싼 신경전, 몸싸움 등이 생긴다. 패배를 수긍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기 외적인 요소가 그만큼 많은 종목이 쇼트트랙이다.

결국 임효준은 빙상연맹으로부터 자격 정지 1년의 중징계를 받았고,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되며 한국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훗날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는 이미 선수생명을 위해 중국 귀화를 선택해 ‘린샤오쥔’이 된 뒤였다.

김정효 교수는 “그가 선택한 국적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빙상연맹이 가장 뼈아파할 나라를 선택했을지도 모른다”면서 “그렇더라도 그에게 ‘매국노’라는 프레임은 옳지 않다”고 했다. 그가 가졌을 피해 의식과 분노, 연맹에 대한 악감정 등을 생각하면 그런 결정을 한 것도 이해가 간다는 의미다. 체육계 전반이 폭력과 인권 문제로 들끓던 시기, 구조적 문제를 해체하는 대신 대중이 쉽게 분노할 수 있는 ‘얼굴 하나’가 필요했고 임효준은 그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는 해석이다.

린샤오쥔은 올림픽을 위해 태극마크까지 포기했지만, 2022년 베이징 올림픽에 나가지 못했다. 국적을 바꿔 올림픽에 나가려면 국제대회 출전 이후 3년이 지나야 했는데 착오가 있었다. 그리고 황대헌은 린샤오쥔이 못 뛴 베이징 올림픽에서 1500m 금메달을 땄다. 그날 린샤오쥔은 SNS에 중국어로 이런 글을 올렸다. ‘내가 돌아오길 기다려. 너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싸울 것.’ 누가 봐도 황대헌을 겨냥한 글이었다. 황대헌은 2023년 임효준 관련 질문에 “린샤오쥔 말씀하시는거죠? 특정 선수 신경쓰기 보다는 내 경기에 집중한다”고 말했다. ‘임효준’ 대신 ‘린샤오쥔’이라고 불렀다.
지난해 하얼빈 아시안게임 남자 500m 금메달을 딴 중국대표팀의 린샤오쥔(한국명 임효준)이 코치 앞에서 눈물을 쏟고 있다. 뉴스1

“매국노 프레임은 옳지 않아, 선택일 뿐”
이제 밀라노의 빙판 위에서 두 선수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다시 만난다. 월드투어 등에서 스친 적은 있지만,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른 줄에 접어든 린샤오쥔과 20대 후반의 황대헌에게 나이로 볼 때 이번 대회는 사실상 마지막 올림픽 대결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과 중국이라는 각기 다른 국적의 유니폼을 입었지만, 두 사나이 모두 지난 8년의 세월 동안 짊어졌던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2018 평창올림픽 쇼트트랙 남자 500m결승을 앞두고 한국 황대헌(오른쪽)과 임효준이 경기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두 선수가 우승 후보 1순위는 아니다. 한국의 임종언이나 현 세계랭킹 1위 윌리엄 단지누(캐나다)가 더 젊고 금메달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쇼트트랙계는 이들의 대결에 숨을 죽인다. 기록 너머에 존재하는 두 인간의 명예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경쟁과 파벌, 그리고 내셔널리즘에 휘말려 고국을 등져야 했던 ‘스포츠 노마드(유목민)’의 기구한 운명이 이 대결에 투영되어 있다.

김정효 교수는 “임효준의 선택을 내셔널리즘 시각으로 배신이라 재단하기보다, 얄궂은 운명이 빚어낸 대결의 드라마로 즐기는 성숙함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밀라노 빙판 위에서 두 사나이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부딪칠 것이다. 찰나의 순간을 다투는 추월과 견제 속에서 양보 없는 전쟁이 치러진 뒤, 우리 앞에는 무거운 질문 하나가 남는다. 과연 올림픽은 인류의 화해와 우정이라는 해묵은 이상을 구현하는 무대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이 잔인한 승부의 끝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더 깊은 감정의 골을 남긴 채 돌아설 것인가. 한솥밥을 먹으며 서로의 엉덩이를 치며 장난을 치던 동료는 이제는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는 적수가 됐다. 밀라노의 차가운 링크가 이들의 해묵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용광로가 될지, 아니면 비극적 서사의 마침표가 될지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김경진 기자



박린.김효경([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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