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한 달째 박스오피스 1위인 로맨스 영화가 나왔다. ‘만약에 우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이 사랑 통역되나요?’는 글로벌 무대를 달구고 있다. 한쪽은 가난한 청춘의 현실 로맨스, 다른 한쪽은 그림 같은 화면에 최강 비주얼 커플이 눈 호강시켜주는 로맨틱 코미디로 결이 다르지만, 공통점은 있다. K컬처를 이끄는 K로맨스의 힘이다. (이하 스포 있음)
#현실 공감 로맨스의 저력 ‘만약에 우리’
충무로에는 ‘로맨스물은 잘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다. 송중기·박보영의 순수미가 절정인 ‘늑대소년’(2012)이 706만 명으로 역대 로맨스 흥행 1위이고 김아중의 뚱녀 변신 ‘미녀는 괴로워’(2006) 608만, 국민 첫사랑 수지의 ‘건축학 개론’(2012) 411만 등의 기록이 있지만, 모두 한국영화가 한창 흥했을 때 얘기다. 충무로 흥행공식이 한 작품 안에 코믹·액션·감동 등을 버무리는 쪽으로 바뀌면서 로맨스물은 흥행 타율이 낮은 마이너 장르가 됐다. 극장가 불황이 깊어진 2020년대 로맨스물로 200만을 넘긴 것은 3일 현재 234만 명을 모은 ‘만약에 우리’, 코믹 터치가 강한 ‘30일’(216만·2023) 두 편이다.
2018년 개봉된 중국 영화 리메이크작인 ‘만약에 우리’가 애초 별다른 주목을 끌지 못한 것은 당연한 얘기였다. 그러나 함께 개봉한 ‘아바타:불과 재’를 밀어내며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더니 4주째 정상을 지키며 장기 흥행 중이다. 작은 영화라 손익분기점도 일찌감치 넘어섰다.
영화는 10년 만에 재회한 남녀가 하룻밤 사이 과거를 돌아보는 얘기다. 평범한 스토리에 담담한 TV 단막극 같은 평작임에도 관객을 모으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평범함과 현실 밀착 일상성 때문이다. 영화는 달달하거나 절절한 로맨스를 대리 체험하게 하는 대신 취업난·가난 등 연애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고달픈 청춘의 현실을 일깨운다(리얼리즘 영화의 무게와도 거리를 둔다). 불안한 미래 때문에 서로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 마지막이었던 남녀는 10년 만의 재회에서 비로소 “안녕”이라고 작별 인사를 한다. 구교환의 아버지가 남긴 편지를 읽는 대목이 ‘눈물 버튼’이란 평이 많다.
배우 출신으로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했던 50대 중반 여성 감독 김도영이 안타를 쳤다. 문가영이 연기파 구교환에 밀리지 않으며 호연한 것도 인상적이다. 굳이 극장에서 봐야 할 이유를 찾기 힘들다는 관람평이 많음에도 선전 중이니, 극장가 흥행 공식이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웰메이드 K로맨스의 매혹 ‘이 사랑…’
최근 K로맨스 중 넷플릭스 글로벌에서 가장 흥행한 작품이다. 지난달 공개 2주차에 넷플릭스 비영어 TV 부문 1위에 올랐고 15개국에서 1위, 60개국에서 톱 10에 진입했다. 넷플릭스 통합(영어권 포함) 순위에서도 최고 3위, 3일 현재 6위로 뒷심을 발휘하고 있다. 3일 넷플릭스 국내 순위는 3위인데 인도네시아·대만·베트남에서는 1위고, 3위 안에 든 나라가 총 11개국이라 국내보다 해외 성적이 더 좋은 편이다.
넷플릭스에서 K드라마는 ‘오징어게임’(2021)의 성공 이후 ‘지금 우리 학교는’ ‘마이 네임’ 등 오리지널 액션·장르물이 인기를 견인하다가 최근에는 로맨스물이 크게 약진하는 모양새다. 2024년 ‘눈물의 여왕’(tvN)이 6억8000만 시청시간으로 K로맨스 1위를 찍으며 기염을 토했다. 시청 지역도 아시아·중동·남미 외에 영어권 국가로 확대되고 있다. 로맨스물은 반복·장기 관람이 많고, 드라마의 사회적 맥락에 대한 별다른 이해가 필요 없는 장르라 시청 허들이 낮은 편이다. 한류의 원조인 ‘겨울연가’부터 로맨틱 판타지를 최고도로 직조해내는 K로맨스는 시대 변화에 맞춰 전복적인 성 역할을 반영하며 변신해왔다. 이 드라마에서도 여주인공이 플러팅을 일삼고, 기습 키스를 먼저 하는 것도 여성이다.
드라마는 남모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여배우가 여러 외국어에 능하지만 사랑의 언어에는 서툰 통역사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통역’을 사랑의 소통을 상징하는 장치로 활용하고, 통통 튀는 대사와 심리적 티키타카에 능한 홍자매의 대본, ‘붉은 단심’으로 영상미를 보여준 유영은 연출의 결합이 시너지를 냈다. 캐나다·이탈리아·일본의 아름다운 배경에 ‘역대급 비주얼 케미’란 평을 받은 김선호·고윤정의 연기 합이 더해져 보는 눈부터 만족스런 드라마다. 특히 고윤정의 사랑스러운 캐릭터 연기가 일품. 후반부 밀도가 느슨해지는 한계에도, 자극적인 서구 로맨스물과 달리 동화적인 분위기, 매혹적인 비주얼, 감정의 빌드업과 폭발, 설렘 포인트의 적절한 배치로 로맨틱 판타지를 극대화해 일종의 대리 연애로 소비되는 K로맨스의 강점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차무희(고윤정 분)가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이중인격(도라미)이 되는 설정도 호불호가 엇갈리는데, ‘너는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라고 낙인찍어버린 어머니가 부정적인 자기로 내재화돼 행복을 망치는 ‘내 안의 훼방꾼’이라는 설정은 충분히 흥미롭다. 차무희는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을 믿지 못하고, 막상 사랑이 찾아오면 스스로 사랑을 깨버리는 회피형 인물이다. “절대로 사랑받을 수 없는 아이가 가장 안전하게 행복해지는 방법은 사랑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버리는 거야.” 도라미가 차무희에게 하는 말이다. 회피형 연애를 했거나 회피형 캐릭터인 사람들이라면 크게 공감할 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