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닫기

시종들 몸 던진 그곳은 결국…영화엔 없는 단종과 영월 이야기

중앙일보

2026.02.04 12:00 2026.02.04 12:37

  • 글자크기
  • 인쇄
  • 공유
글자 크기 조절
기사 공유
영월 청령포 안쪽에 있는 단종어소. 내부에 조선 단종의 유배 생활 당시 모습을 재현한 밀랍인형이 전시돼 있다. 백종현 기자
강원도 영월에 들어서면 시간의 결이 슬쩍 바뀐 듯한 착각이 든다. 깎아지른 벼랑과 굽이치는 물길이 맞물려 흘러가는 땅. 왕이었으되 왕으로 살지 못했던 단종(1441~57)의 슬픈 사연이 5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영월의 강과 길, 밥상에 남아 있다. 단종의 유배 생활을 그린 영화 ‘왕과 사는 남자(4일 개봉)’도 영월에서 주요 장면을 촬영했다. 영월에서 단종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육지 속의 섬, 청령포의 오늘

강이 사방을 휘감고, 육중한 산이 뒤를 막아서고 있는 청령포. 지금도 나룻배로만 드나들 수 있다. 지금은 강이 다 얼어붙어 있는데, 아침마다 언 강을 깨뜨려 배를 띄운다. 백종현 기자
숙부 수양대군(세조)에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1457년 영월 땅으로 밀려났다. 단종이 귀양살이한 영월 청령포는 ‘왕과 사는 남자’의 대사를 빌리면 대략 이런 세계다.

“너구리도 환장해 졸도하는 오지의 섬, 육지 안의 섬 청령포. 여름엔 끈적한 습기가, 겨울엔 강가의 냉기가 올라오는 곳. 최적의 유배지라는 말입니다.”

수백 년이 흘렀지만, 청령포의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맞은편 선착장에 서자 ‘육지 안의 섬’이라는 표현이 단번에 이해됐다. 서강이 사방을 휘감고, 뒤로는 산이 옹벽처럼 받치고 서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청령포는 배로만 드나들 수 있다. 마침 강추위로 폭 70m의 강이 얼어붙어 있었는데, 나룻배는 쉬지 않았다. 이갑순 문화해설사는 “안전을 위해 아침마다 얼음을 깨 물길을 낸다”고 말했다.
청령포 단종어소 뒤편은 울창한 솔숲이어서 거닐기 좋다. 백종현 기자
청령포는 유배지인 동시에 기억이 겹겹이 쌓인 숲이다. 숲 안쪽에 단종의 유배기를 증명하는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와 금표비(禁標碑), 단종이 한양을 그리며 쌓았다는 망향탑 등이 있다.

키가 30m에 이르는 600년 수령의 소나무는 단종의 통곡을 보고 들었다는 데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왕의 거처였던 단종어소 앞에는 일명 ‘엄흥도 소나무’가 가로누운 듯 기형적인 자세로 뿌리내려 있다. 엄흥도는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충절의 상징이다. 흡사 단종을 향해 절을 올리는 형상 같았다.
일명 '엄흥도 소나무'가 본채와 단묘유지비를 향해 절을 하듯 누워 있다. 백종현 기자
정근영 디자이너


지나간 길, 남겨진 능, 사라진 흔적

배일치재 고갯마루. 단종이 한양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의 석상과 비석이 있다. 백종현 기자
단종은 1457년 6월 22일 창덕궁을 떠나 7일 만에 청령포에 닿았다. 지도에서는 한 줄 선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산과 고개가 이어지는 고행길이었다.

영월에 이 여정을 따라 걸을 수 있는 ‘단종대왕유배길’이 조성돼 있다. 영월로 접어드는 첫 길목 솔치재에서 시작해 군등치, 옥녀봉을 거쳐 청령포로 이어지는 44.5㎞의 길이다. 족히 12시간이 걸리기에, 핵심 구간만 걷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다. 배일치재는 한양에 남겨둔 왕비와 어머니를 그리며 절을 올렸다는 자리다. 고갯마루에 단종이 절을 올리는 모습의 석상이 서 있다. 영월 10경 중 하나인 선돌도 유배의 흔적이 서린 현장이다. 이 절벽 아래 천변을 따라 단종이 청령포로 나아갔다.
영월 장릉. 단종의 묘. 서울과 경기도권 밖에 있는 유일한 조선 시대의 왕릉이다. 260129. 백종현 기자
단종은 청령포가 장마로 침수될 위험에 놓이게 되자 두 달 만에 거처를 읍내의 관풍헌으로 옮겼다. 거기서 두 달 가량을 더 살다 사약을 받았다. 단종이 죽자, 엄흥도는 영월 선산 양지 바른 곳에 남몰래 시신을 묻었다.

그곳이 지금의 장릉이다. 묘는 그대로 200년 넘게 방치돼 있다가, 숙종 때야 단종 복위가 이뤄지면서 ‘장릉’이라는 능호를 얻었다. 장릉이 수도권 밖에 자리한 유일한 조선 시대 왕릉이 된 연유다.

단종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는 이후 숨어서 살았다. 이갑순 문화해설사는 “영월을 떠나 계룡산 동학사에서 단종 3년상을 치른 뒤 문경에서 은둔했다고 전해진다”고 말했다. 현재 경북 문경에 그를 기리는 충절사라는 사당이 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온전히 남아 있는 건 아니다. 장릉 인근의 엄흥도 기념관은 2021년 화재로 ‘충절의 상’ 동상만 남기고 다 사라졌다. 단종 승하 뒤 시종들이 강물에 몸을 던진 낙화암도 최근 관광지 개발의 파도를 피하지 못했다. 영월군이 ‘봉래산 명소화 사업’ 목적으로 낙화암과 영월역을 잇는 다리를 놓고 있다. 이미 달라진 풍경 앞에서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단종 승하 뒤 시중들이 강물에 뛰어든 낙화암(금강공원). 현재 경관 보도교와 전망 타워를 놓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백종현 기자


단종의 밥상, 어수리 한 상

어수리 전문 식당 '박가네'의 박금순 대표. 영화 '왕의 사는 남자' 속 단종이 먹던 어수리 장아찌와 백숙도 그의 솜씨다. 백종현 기자
영월에는 ‘임금에게 드린다’라는 뜻을 지닌 나물도 있다. 예부터 청령포 관음송 일대에서 무성하게 자랐다는 어수리다. 유배 시절 단종의 밥상에도 빠지지 않았을 음식이다. 곤드레처럼 밥으로도 지어 먹고 무쳐도 먹는데, 곤드레보다 향이 더 진하다.

영월 읍내에 어수리 전문 ‘박가네’가 있다. 영화 속 단종의 식사 장면에 쓰인 어수리 요리도 이 집에서 댔다. 이른바 ‘단종의 밥상’이라는 별명이 붙은 어수리 더덕 정식(1만8000원)이 인기 메뉴다. 어수리를 활용한 장아찌·인절미·전 등 12가지 찬과 어수리 솥밥이 올라온다. 요즘은 사계절 내내 맛볼 수 있지만, 어수리가 가장 맛 좋은 계절은 역시 봄이다. 박금순 대표는 “4월에 뜯은 어수리는 막 돋은 봄처럼 연하고, 들의 향을 깊게 품고 있다”고 말했다.
어수리 더덕 정식. 어수리를 넣은 나물 밥을 비롯해 어수리를 활용한 인절미·전·장아찌 등 12가지 찬이 올라온다. 백종현 기자
영화 속 청령포는 사실 청령포의 모습이 아니다. 청령포 주변이 관광지로 변모한 탓에 촬영 여건이 맞지 않았다. 대신 인근 선돌마을에 세트를 지어 옛 청령포를 재현했다.

영화를 제작한 박윤호 프로듀서는 “전국을 뒤지고 다녔는데, 결국 청령포 옆 선돌마을에 세트를 차렸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물길, 육중한 산세가 청령포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고 말했다. 건너편 소나기재 전망대에서 선돌마을과 서강 그리고 선돌이 어우러진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유배길에 단종이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은 영월 어라연에서 촬영했다. 물길 옆으로 기암절벽이 솟은 천혜의 장소다. 동강의 명물 판운리 섶다리도 유배길의 무대가 됐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 뗏목을 타고 강 건너 청령포로 들어가는 장면. 실제로는 청령포가 아니라 어라연에서 촬영했다. 사진 쇼박스



백종현([email protected])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