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한 번 K팝 아이돌처럼 팬미팅 사진을 찍어보자”는 사회자 말에 머쓱해하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웹툰 ‘송곳’과 ‘지옥’으로 유명한 최규석(48) 작가다. 지난달 30일 일본 신주쿠에 있는 주일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작가와의 대화 행사장. 카메라를 설치하는 사이 팬들을 등지고 ‘아이돌처럼’ 사진을 찍기 위해 바닥에 앉은 그가 어색해하자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날 자리를 채운 사람들은 100여 명. 모두 사전 응모해 당첨된 일본인 팬들로, 이들은 사진 촬영 내내 손하트를 날렸다. 여느 K팝 아이돌 팬미팅과 달랐던 점은 하나. 참석자들은 그에게‘당신은 왜 그림을 계속 그리는가. 상상력은 어디서 나오며, 지옥은, 천사는 무엇인가’와 같은 묵직한 질문을 연신 던졌다. ‘만화 대국’ 일본에서 한국 웹툰을 알리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개최한 ‘세로로 읽는 이야기, 2026 K웹툰 전시’를 위해 일본을 찾은 그를 만나봤다.
그는 “직업인으로서의 고향에 온 기분”이라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경남 진주 진양군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가 처음 일본 만화를 접한 것은 중2 때였다. 만화를 좋아하는 친구가 “엄청난 것이 나왔다”고 했다. 아다치 미쓰루(安達充)의 만화책 ‘터치’였다. 책을 펴든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과장된 액션 대신 눈동자의 움직임이나 스쳐 지나가는 새 한 컷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연출은 지금도 마음에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학창시절 수학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고향에 가는 버스 좌석에서 만화 아이디어를 구상하던 그가 처음 신인상을 받은 건 1998년의 일이다.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만화가는 ‘아기공룡 둘리’로 유명한 김수정 작가. 그는 “‘말맛’이 살아있어 판소리 사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둘리를 오마주한 단편 ‘공룡 둘리’는 그를 화제 인물로 올려놓기도 했다. “(김수정)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어요. 진양군 출신의 만화를 공부하는 사람이다. 둘리가 좀 망가질 거라고요.(웃음)” 그는 자신이 이 단편으로 주목을 받은 데 대해 “당시 한국 만화 자체가 쇠락기여서 관심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습지생태보고서’에 이어 100명 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린 ‘송곳’(2013년)은 그에게 ‘웹툰 작가’란 칭호를 붙여줬다. 대형마트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노동문제를 그린 이 작품은 드라마로도 만들어져 반향을 일으켰다. 2019년부터 연재한 웹툰 ‘지옥’은 그의 영역을 넷플릭스라는 새 영역으로 발 딛게 했다. 대학 친구인 연상호 감독이 이를 드라마로 만들었는데, 넷플릭스 전세계 시리즈 순위에서 오징어 게임보다 빠르게 1위를 차지할 정도로 호평받았다.
이날 시작된 전시회에선 많은 관객들이 그가 그린 ‘지옥’의 작업 과정들이 묘사된 전시 공간을 찾았다. 전시회를 둘러본 그는 “일본에서도 내 만화를 봐주는구나, 놀랍고 반갑다”고 했다. 그는 “한국 만화 산업이 쇠퇴하던 당시 웹툰이 생겨났다”며 “웹툰으로 인해 한국 만화 작가들의 정체성이 만들어졌다”고 평가했다.
만화책이 아닌 스마트폰을 이용해 세로로 읽어 내려가는 형식이 한국에서 태어나면서 작가들에겐 새로운 압박감도 생겨났다고 했다. “독자를 주체적으로 찾아다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많은 작가들이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이용해 독자와의 직접 소통하며 실험에 나서고 있는 점을 거론했다.
새 작품을 구상 중이라는 그는 상상력의 비결로 ‘규모 있는 사고를 진행할 수 있는 시간 만들기’를 꼽았다. 독서실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강제적으로 시간을 부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한·일 고대사에 대한 관심도 드러냈다. “한반도에서 나는 투박조개가 일본 열도에서 발견되고, 일본에서만 나는 흑요석이 한반도에서 나오는 건 국가라는 것이 만들어지기도 전 한·일이 빈번히 교류했다는 반증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는 “일본 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들이 직업적으로 찾아낸 도구가 웹툰”이라며 “새 문화 장르인 웹툰을 한·일이 많이 사랑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