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전환이 가속화하고 산업 질서가 빠르게 재편되는 국면일수록, 변화의 충격을 견뎌낼 수 있는 기반이 무엇인지 되짚는 일이 중요하다. 그 기반을 현장에서 가장 꾸준히 떠받쳐 온 축이 ‘기업연구소’다.
기업연구소는 우리 산업이 ‘추격’에서 ‘경쟁’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축적된 제도적 자산이다. 1979년 당시 우리 경제는 저임금과 모방 기술에 기반한 성장의 한계에 직면했고, 민간 기업의 기술 내재화 없이는 산업 구조를 전환하기 어려웠다. 이에 정부는 민간 연구개발(R&D)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기업연구소 인정을 시작했으며, 이는 1980년대 초 ‘기업부설연구소 인정제도’로 제도화돼 40여년간 운영돼 왔다.
기업연구소는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기술을 축적하며 국가 경제를 이끌었으며, 이후 반도체·자동차·정보통신기술(ICT) 등 주력 산업의 세계적 경쟁력을 형성하는 핵심 기반이 됐다. 이 제도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기업 내부에서 이뤄지던 기술 연구를 비공식적 영역에 머물게 하지 않고 국가 혁신 시스템 안으로 편입시켰다는 점에 있다. 그 위에 정책과 인력, 투자 전략을 체계적으로 쌓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업부설연구소 인정제도의 법적 근거는 오랜 기간 기초연구법의 일부 조항에 포함돼 있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기업의 연구 활동이 공공·기초 연구의 부속 영역처럼 다뤄질 수밖에 없었고, 시장성과 속도, 실패 위험을 전제로 하는 기업 R&D의 특수성이 정책 설계에 충분히 반영되기 어려웠다.
이런 맥락에서 이달부터 시행된 ‘기업부설연구소법’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국가 연구개발 예산 규모의 80% 이상을 담당하는 기업연구소를 단순한 정책 대상이 아닌 정책 파트너로 대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됐기 때문이다. 법 제정은 예산과 하위법령, 정책 지속성을 함께 확보한다는 의미로, 기업의 연구개발 활동을 정권의 변화나 경기 국면과 무관하게 중장기적으로 다뤄야 할 항구적인 국가 정책 영역으로 명확히 규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연구개발 인력에 대한 의미도 더욱 분명해졌다. 인정제도는 연구자에게 연구전담요원이라는 공식적 지위를 부여하고, 연구 활동이 겸업이 아닌 전담 업무임을 제도적으로 명확히 했다. 이는 단순한 처우 개선을 넘어, 기업 연구자의 직업 정체성과 전문성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특히 ‘기술개발(기업 R&D)인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것은 기업 연구개발 성과를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기리고, 기술혁신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사회적으로 분명히 하는 계기라는 점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다.
다만 현실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연구개발과 인력 투자 전망은 올해도 완전한 회복 국면에 이르지 못했다. 기업 투자가 위축될수록 혁신의 속도와 폭은 함께 제한될 수밖에 없다. 특히 피지컬 인공지능(AI) 같이 융합 역량이 요구되는 기술 환경에서는 개별 기업의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며, 산업 생태계 전반의 경쟁력이 함께 제고되지 않는다면 기술 격차는 더 빠르게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기업부설연구소법은 이러한 전환기에 필요한 제도적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물론 법 시행만으로는 단기간에 기업 투자가 확대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이 법은 변동성이 큰 환경에서도 기업이 연구개발을 쉽게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안전망으로 작동할 것이다.
기업부설연구소 인정제도가 지난 40여년간 산업 경쟁력의 기반을 닦아왔다면, 기업부설연구소법은 그 성과를 다음 단계로 잇기 위한 제도적 장치다. 지난 40년이 기술을 축적하는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40년은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혁신을 만들어 가는 시간이 돼야 한다. 이 법을 계기로 기업 경영과 정부 정책, 나아가 사회 전반에 기술 혁신의 토대가 더욱 깊이 뿌리내리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