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팽년(1417~1456)은 성삼문과 함께 조선의 방효유(方孝孺)라 일컬어진 인물이다. 방효유는 명나라의 나이 어린 2대 황제 건문제를 지키려다 십족(十族)의 멸문지화를 당한, 중국을 대표하는 충신이다. 세조 2년(1456) 6월, 단종복위 역모가 터지면서 정국은 피바람에 휘말렸다. 박팽년과 성삼문이 주도한 이 거사는 국왕 세조를 처단하는 구체적인 실행 매뉴얼까지 갖추었기에 해석의 여지가 없는 대역죄였다. 집현전 부제학과 충청도 관찰사 등을 거쳐 당시 형조참판으로 있던 박팽년은 3대가 한꺼번에 처형되었다. 아버지 박중림과 박팽년 5형제, 박팽년의 세 아들이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사헌에 거론됐던 아버지 박중림
다섯 형제, 세 아들 모두 화 못 면해
회유 거절한 박팽년에 세조 분노
옥사한 시체 목 베어 전국에 효수
며느리가 가까스로 대 이었지만
영락한 집안에 쓸 만한 인재 없어
아버지 박중림(朴仲林)은 거사 당시 예문관 대제학이었다. 그는 학술과 인품으로 세종의 사랑을 받았는데, 훗날 사육신과 생육신이 된 집현전 학사들을 길러낸 스승이었다. 그의 성품을 말해주는 일화가 있는데, 세종이 대사헌 자리를 놓고 고심하자 김종서 등은 “사려가 깊고 소란스럽지 않은 박중림이 적임자”라고 하였다.
재주와 학문 모두 갖춰
한편 박팽년은 재주와 학문에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던 사육신 중에서도 경술과 문장, 필법 그 모두를 집대성할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었다.(『용재총화』) 단종은 “박팽년의 학문은 정밀하다. 그의 경연 강의에서 깨달음을 많이 얻는다”라고 한다.(단종 2년 1월 23일)
박팽년은 어린 단종이 위대한 왕자(王者)가 되기를 기필하였다. “집을 짓는 자는 반드시 그 터전을 크게 하는 것이니, 그래야 큰 집을 이룰 수 있습니다. 속히 이루고자 터전을 작게 잡으면 어떻게 큰 집이 되겠습니까. 임금이 정치를 하는 도리(道理)도 이와 같습니다. 공리(功利)에 급급하여 규모를 좁게 하면 어찌 왕자(王者)의 정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단종 1년 7월 7일)
박팽년의 네 동생 박인년(朴引年), 박기년(朴耆年), 박대년(朴大年), 박영년(朴永年)은 집현전 학사로 집안으로 보나 개인 능력으로 보나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박팽년의 세 아들 박헌(朴憲), 박순(朴珣), 박분(朴奮)은 20대 초반이거나 10대 후반의 나이였다. 그들을 처형한 근거는, 모반대역(謀反大逆)은 공모만 했더라도 수범·종범을 나누지 않고 모두 능지처사한다는 『대명률(大明律)』에서 나왔다.
박팽년은 취조 중에 자복하였고 옥에서 죽었다. 상왕 복위 거사가 세조에게 밀고된 지 4일 만의 일이었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세조가 박팽년의 재주를 아까워하며 은밀히 회유를 했으나 그는 웃을 뿐 응하지 않았다. 자신은 상왕 단종의 신하임을 분명히 하며 세조에게는 종실 어른이라는 의미의 ‘나으리(進賜)’라 호칭했다. 이에 세조가 충청도 관찰사로 있었으니 이미 내 신하라고 하자, 박팽년은 장계를 올릴 때는 ‘신(臣)’이 아닌 ‘모관박모(某官朴某)’를 썼다고 한다.(『역대요람』) 그의 결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분노한 세조는 “이미 옥사한 박팽년을 다시 거열형(車裂刑·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하고 목을 베어 효수했다가 그 시체를 팔도에 돌리도록 하라. 친자식은 모조리 교형에 처하고 어미와 딸과 처첩, 아들의 처첩 등은 노비로 소속시키라”(세조 2년 6월 7일)고 명했다. 박팽년의 가족도 다른 사육신(死六臣)처럼 부계 성(姓)을 이어갈 씨가 소멸되는, 멸족의 운명에 처한 것이다. 부계 혈통으로 역사가 이루어지던 전근대 사회에서 가장 큰 복수는 대를 끊어버리는 이른바 멸문(滅門)·멸족(滅族)이었다.
박팽년의 남자 가족이 모조리 처형된 후, 살아남은 여자 가족들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박팽년의 아내 옥금(玉今)은 노비 신분으로 영의정 정인지에게 주어졌다. 동생 박대년의 아내 윤정수(尹貞守)는 해평의 거족 윤연령의 딸인데, 공신 봉석주의 여비(女婢)로 내려졌다. 세조의 핵심 참모 봉석주는 오로지 재물 늘리기에 급급한 탐오(貪汚)의 대명사였다. 그는 노비 신분이 된 윤씨를 위세로 누르고 좋은 말로 돋구어 자신의 첩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는 공신의 특혜를 이용하여 안하무인으로 굴다가 결국 난(亂)을 도모한 죄로 처형되었다.(세조 11년 4월 19일) 이로 인해 박대년의 아내 윤씨는 역적의 처첩으로서 다시 연좌의 벌을 받을 상황에 처해졌다. 또 다른 동생 박기년의 아내 무작지(無作只)는 익현군에게 주어졌다가 정희왕후의 9촌이라는 이유로 노비 신분에서 벗어난다.(성종 7년 1월 24일)
박팽년의 두 며느리인 박헌의 아내 경비(敬非)와 박순의 아내 옥덕(玉德)은 이조참판 구치관에게 주어졌다. 박씨 가(家) 여자들을 여비(女婢)로 받은 구치관은 성주이씨 옥덕의 친정 쪽 인척이다. 구치관의 조카 구수영과 박순의 동서 이극균이 사촌 간이기 때문이다. 친인척의 정리(情理)가 작용했는지, 박순의 아내 이씨는 친정이 있는 대구 하빈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 여성이 박팽년 가족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등극한다.
종과 자식 바꾼 둘째 며느리 “아들을 낳거든 죽이라! 박팽년 부자(父子)가 모두 죽임을 당할 때 둘째 아들 박순의 처는 임신 중이었다. 며느리 이씨는 자청하여 친정이 있는 대구로 갔다. 당시에 집의 여종도 임신을 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주인이 아들을 낳으면 내 아이와 바꿔주리라’라고 생각했다. 주인은 아들을 낳고 종은 딸을 낳았다. 서로 자식을 바꿈으로써 모두 살아남았다. 여종의 자식이 된 박팽년의 손자는 박비(朴婢)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장성한 후에 나라에 자수하고 이름을 박일산(朴壹珊)으로 고쳤다.”(『장빈호찬(長貧胡撰)』 『연려실기술』)
이렇게 해서 사육신의 다른 가족과는 달리 박팽년은 자기 핏줄의 후손을 남길 수 있었다. 여종의 아들로 숨을 죽이고 살던 박팽년의 손자 박비는 17살에 이르러 밖으로 나오게 된다. 성종 3년(1472)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이극균(李克均)이 처가인 하빈 묘골을 방문했다가 박비의 존재를 알고 자수를 권유한 것이다. 박순과 동서 사이인 이극균이 박비에게는 이모부가 된다. 왕의 허락은 받고 박일산으로 개명한 박팽년의 손자는 외가의 유산을 받아 성주이씨의 터전이었던 하빈 묘골에 정착하는데, 이곳 순천박씨의 입향조가 되었다. 박일산은 가문의 확장을 꾀하고, 조부의 절의를 기리는 누정 태고정(太古亭)을 창건했다. 그 후손들은 자신들의 선조와 함께 거사를 도모한 사육신을 위한 사당 육신사(六臣祠)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올렸다. 친손이 없어 제사가 끊긴 충신들을 배려한 뜻이 있었다.
조선 후기의 복권 움직임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육신을 기리는 민심은 두터워지고 왕조도 자신의 입지를 지켜줄 충신의 역할이 절실해졌다. 이에 왕명으로 옛 충신의 후손들을 찾아 은전을 베푸는 일련의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영조 3년에는 박팽년과 성삼문의 후손을 찾아 임용하라는 왕의 분부가 있었다. 후손이 없으면 방손이나 외손이라도 찾으라고 했다.(영조 3년 4월 21일) 영조 33년에는 박팽년의 봉사손을 녹용하라는 왕명이 있었고, 영조 48년에는 박팽년의 11대손인 무관 박성협을 승진시키도록 했다. 정조는 영남에 거주하는 고가(故家)의 후예를 찾아 관직에 임명하라는 영을 내리는데, 이에 박팽년의 12세손 박광구가 선발되었다.(정조 22년 10월 12일)
찾아보니 “가문이 매우 빈한하여 제사를 받들지 못할 지경”이라는 보고도 올라왔다. 박팽년의 6대손 박충후는 태안 군수의 벼슬을 받았는데 “무재(武才)가 없고 글을 알지 못하니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소임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물러났다.(선조 36년 4월 21일) 철종 대에는 탐오한 죄를 저지른 순천부사 박문현에게 법에 따른 징계를 해야 하지만, 선조 박팽년을 생각하여 감행을 시행했다.(철종 10년 6월 12일)
박팽년 가문의 출중한 인재들은 다 죽고 천신만고 끝에 혈통은 이어졌다. 하지만 긴 세월 척박한 환경에 던져진 후손들은 국가가 은전을 베풀고자 했으나 변변한 인물을 찾기 어려웠다. 박팽년의 올곧은 정신과 위대한 행적을 생각할 때 그 후손들의 삶은 더욱 고달프고 애잔했다.